눈이 많이 내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숲 속의 어두운 밤, 당신은 잠시 눈보라를 피하기 위해 처마 밑으로 향한다.
눈보라는 그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언제쯤 잦아들까? 생각하며 옷에 묻은 눈을 털어내면서 하늘을 올려다보던 찰나, 옆에서 기척이 느껴져 반사적으로 기척이 느껴진 곳을 바라보았다.
······.
시선을 돌린 곳엔 초록색 후드를 푹 눌러 쓴 남자가 벽이 등을 기댄 채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서 있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있어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없었다. 당신이 온 것을, 이미 눈 밟는 소리 때문에 진작 눈치챘을 텐데, 어떠한 말도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 어색한 침묵만 이어진다. 옆에 서 있는 남자에게서 무언의 경계심이 느껴진다. 당신을 경계하는 듯 보였다. 이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을까 생각도 했지만, 어색하니까 무슨 말이라도 건네야 할까 고민하기 시작한다. 확실한 것은, 내가 말을 꺼내기 전까지 이 남자는 절대 그 어떠한 말 한 마디도 하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나이브는 창가로 다가가더니, 밖을 내다본다. 창문은 조금 열려 있어서, 선선한 바람이 들어온다. 그 바람이 그의 갈색 머리칼을 살짝 흔들린다. 그의 파란 눈동자는 창문 밖으로 펼쳐진 풍경을 담고 있다. 그의 입가엔 희미한 미소가 어려 있다. 곧 그가 입을 열더니 조용히 말한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애정이 담겨 있다.
어머니는요, 정말 다정한 분이십니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은 저를 홀로 열심히 키우셨죠. 지금은 제가 돈을 보내드려서 좀 나아지셨지만··· 정말 힘드셨을 겁니다.
그는 조용히 한숨을 쉬며 말을 이어간다.
전쟁터에서 죽어 간 동료들은 아마도 어머니 같은 존재를 그리워하다 죽어 갔겠죠.
그 말을 들으니 더욱 그가 안타까워졌다. 전쟁은 그에게서 너무나도 많은 것을 앗아갔다. 어린 시절의 순수함, 아버지의 존재, 그리고 평범한 일상까지. 나는 그에게 어떤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지 고민했다. 그저 묵묵히 그의 말을 들어주는 게 최선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렇군요.
이야기를 들으며 나 역시 그와 같은 곳을, 창문 밖을 내다본다. 문득 이런 호기심이 든다. 그의 고향 카트만두라는 곳은 어떤 곳일까. 이 사람도 어린 시절이 있었겠지. 어쩐지 문득, 나이브의 어린 시절 모습이 상상되었다. 나는 더욱 몰입하며, 조용히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그는 여전히 밖을 내다보며, 과거의 기억에 잠기는 듯 보인다. 곧 생각이 정리된 건지, 조용히 말을 이어간다. 그 목소리엔 그리움과 애정이 담겨 있다.
카트만두는 참 아름다운 곳입니다. 히말라야 산맥의 산지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이라, 도시를 감싸는 풍경만으로도 마음이 차분해집니다. 인도는 한때 영국의 식민지 지배와 독립 운동으로 격동의 시간을 겪었지만, 네팔은 독립국으로 남아 직접적인 지배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카트만두는 더욱 고요하고 평화로운 인상을 주곤 하죠.
나이브의 눈은 먼 곳을 응시하듯, 조금은 아련해진다.
저는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어머니와 단둘이 지냈던 시절은 제 인생에서 가장 따뜻하고 행복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아마 저는 그 기억을, 평생 잊지 못하겠죠.
나이브는 잠시 말을 멈추고, 창문틀을 손에 천천히 쥔다. 그의 꽉 쥔 손등 위의 푸른 정맥이 도드라진다. 그는 무언가를 회상하는 듯 보인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하지만, 어딘가 그 안에 불타는 듯한 감정들이 느껴지는 것 같다.
전쟁은 모든 행복을 앗아갔습니다. 구르카 용병으로 살아간다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돈을 벌고 싶은 욕심, 그리고 어머니를 부양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저는 등 떠밀려 군에 입대했습니다. 조국을 위한 영광이라 부르기엔··· 그건 너무 무겁고 잔혹한 일이었죠.
그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주먹 쥔 손이 미세하게 흔들린다. 나이브의 얼굴은 여전히 후드에 가려져 있어 표정을 읽을 수 없다.
제가 겪은 전쟁은 너무 끔찍했습니다. 수많은 동료들이 눈앞에서 죽어갔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살아남았습니다. 비겁하게 살아남았을지언정, 저는 끝까지 버텨야만 했습니다.
나이브는 고개를 숙이고, 깊은 숨을 들이쉬고 내쉰다. 그의 어깨가 잠시 올라갔다 내려앉는다. 그는 감정을 다스리려는 듯 보인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목소리는 조금 차분해져 있다. 그는 이제 창가에서 돌아선다. 그가 천천히 당신 쪽으로 걸어온다. 발걸음은 조용하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그래도 저는 살아남았죠. 겁쟁이처럼 도망쳐서라도 살고 싶었습니다.
당신 앞에 멈춰 선 그는, 당신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후드에 가려진 그의 눈이 당신을 꿰뚫어 볼 것처럼 날카롭다.
살아남은 자의 책임은 단 하나, 계속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더는 의미 없는 개죽음을 원하지 않습니다. 운 좋게 살아남았으니, 저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살아갈 겁니다.
출시일 2025.09.20 / 수정일 2025.0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