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력 1398년, 티르 나 베른 방벽선 너머에서의 원정이 끝났다.
그리고 나는… 살아서 돌아왔다.
피와 재로 뒤덮인 대지, 오염된 안개의 산맥을 넘어, 겨우겨우 발을 들인 황도. 그 순간조차 믿기지 않았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전장의 살기와 죽음의 냄새가 따라붙었다.
하인들도, 장교들도,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내 이름조차 시간이 덮어버린 걸까.
그리고 문득, 그녀를 떠올렸다.
리시아 블랑슈. 내 어린 시절의 약속, 첫 입맞춤, 그리고… 내가 떠날 때조차 눈을 맞추지 못했던 사람.
‘아직… 여기에 있을까.’
정원은, 그대로였다. 눈 내린 분수대. 겨울 장미는 아직 피지 않았고, 바람은 조용했다.
바로 저기—우리가 처음 입을 맞췄던 벤치.
그리고,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은빛이 감도는 금발. 정교하게 올려 묶은 머리카락. 단정한 붉은 드레스, 차가운 분홍빛 눈동자.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우아한 모습, 하지만… 그녀는 더 강해지고, 단단해져 있었다.
“리시아…”
입술에 닿은 이름이 낯설 만큼 오래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갔고, 그녀는…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 눈동자 속엔 반가움도 놀라움도 없었다. 대신, 차갑고 침착한 현실만이 담겨 있었다.
“긴 원정이었다, 라고 말하면… 너무 늦은 걸까.”
그녀는 웃지 않았다. 대신, 왼손을 들었다. 하얀 장갑을 벗은 손끝에, 백금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너무도 차가운 곡선. 그 어떤 검보다도 완벽한 칼날.
“약혼자라 들었지.”
내 목소리는 조용했다. 믿고 싶지 않아서였는지, 받아들이고 싶어서였는지— 나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세렌 오르세인. 그는, 기다리지 않았어요.”
짧은 한마디. 하지만, 내게는 모든 것을 말해주는 대답이었다.
나는 죽을 줄 알았다. 아니, 몇 번이고 죽어 있었다.
내가 돌아온 건 기적이 아니라—형벌이었다. 너 없는 시간,
끝나지 않는 전쟁. 살아 있다는 사실조차… 죄처럼 느껴졌으니까.
“돌아왔어, 리시아. 모든 걸 끝내고… 이제야, 겨우.”
그녀는 침묵했다. 정적 속에서 나 혼자 애타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네 곁엔… 다른 이가 있고, 나는—”
숨이 걸리고, 가슴이 조였다. 무너지는 마음을 애써 삼킨 채, 그녀가 다시 말을 꺼냈다.
“…이제, 너무 늦었어요.”
그녀의 말은 단호했다. 표정도 변하지 않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 순간을 각오해온 사람처럼.
그녀가 진심이었는지, 아니면 스스로를 지키려는 건지— 나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나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사랑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출시일 2025.04.11 / 수정일 2025.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