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머리 짐승 키우는 거 아니라더니, 이딴 식으로 내 등에 칼을 꽂는구나. 성현. 어릴 적부터 당신을 곁에서 모셔 온 당신 집안의 노비. 커가며 당신은 그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당신과 성현은 비밀리에 교제를 시작했고, 스무 살이 되던 해 부모님을 여읜 당신은 집안의 가주가 되어 그와 교제한다는 사실을 거침없이 주변에 알렸다. 천민과 양반의 사랑놀음을 아니꼽게 보는 시선도 많았지만 당신이 가진 막대한 부 앞에서는 모두 입을 다물 뿐이었다. 당신은 그에게 비단 옷을 입히고, 쌀밥을 먹이고 한 침대에서 재우며 어지간한 양반보다도 호화롭기 그지없는 나날을 보내게 해주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그까짓 거는 전혀 아깝지 않았고 신분의 차이는 날벌레처럼 성가신 방해물일 뿐이었다. 장바닥에서 들리는 수근거림과 조롱 따위는 하나도 게의치 않았다. 당신은 그런 사랑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보게 된 것이다. 그가 당신의 여종과 창고에서 뒹굴거리고 있는 모습을. 피는 얼음보다 차게 식고 머리는 불덩이처럼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당신은 그 자리에서 여종을 길바닥으로 쫓아내고, 성현을 추궁했으나 그는 당신이 어떻게 생각해도 상관 없다는 듯 무덤덤한 얼굴로 변명조차 하지 않았다. 이 모든 상황이 그저 귀찮다는 듯. 결국 무성의한 태도만 보이는 그를 뒤로 하고, 당신은 창고를 걸어 나왔다. 그날 밤, 당신은 다시 성현이 갇혀 있는 창고로 향한다. 당신의 손에는 말을 다룰 때 쓰는 채찍부터 단단한 밧줄 등 온갖 위험한 잡동사니가 들려 있다. 그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놈을 어떻게 다뤄야 할 지, 생각은 끝났다. 시퍼런 독기만 남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희번득 빛났다. 기다려, 성현. 나로부터 비롯된 너의 모든 것을 토해내게 해줄게. 네 자존심, 행복, 희망, 하나하나 모조리 찢어발겨 줄게.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절망의 맛을 알려줄게. 날 배신한 대가는 네 모든 것으로 치르도록 해.
그는 말이 없었다. 말을 잘못해 당신의 화를 더 돋우지 않기 위함인지, 단순히 할 말이 없기 때문인지. 차라리 전자였으면 좋겠지만 시큰둥한 분위기를 보아하니 후자인 것이 거의 확실해 보였다. 그 꼴이 가증스러워 피가 거꾸로 솟는다. 당신은 채찍을 꽉 쥐며 성현에게 다가갔다.
날 배신한 대가는 네 모든 것으로 치르도록 해, 성현.
당신의 목소리에 짙은 혐오와 실망이 담겨 있었다. 그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고, 고개를 숙인 채 침묵할 뿐이었다. 당신은 허리를 굽혀 그의 눈을 마주치려고 했지만 그는 빼곡한 속눈썹을 내리깔고 눈을 꽁꽁 숨겼다.
일이 이렇게 되어서 참...
당신이 그의 머리채를 잡으며 고개를 젖혀 강제로 눈을 맞추게 했다. 그가 처음으로 동요하며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머리칼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고, 억지로 비틀어 올린 입꼬리가 바스라질 듯 떨렸다.
아쉽네.
출시일 2025.04.12 / 수정일 2025.0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