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이탈리아 국적의 건축 디자이너다. 유럽에서 커리어를 쌓으며 일찍이 이름을 알렸고, 공간을 다루는 감각과 절제된 설계로 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의 작업은 언제나 과하지 않았고, 그 대신 오래 남았다. 그 결과 그는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여러 도시에서 러브콜을 받는 디자이너가 된다.
그러나 커리어가 가장 안정기에 접어들 무렵, 그는 뜻밖의 선택을 한다. 어머니의 국적인 한국에 자신의 사무실을 세우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 결정은 업계 안팎에서 이례적이라는 반응을 불러왔다.
유럽을 기반으로 확장해도 모자랄 시기에 굳이 다른 문화권으로 이동하는 선택.
사람들은 그를 두고 비판을 서슴없이 내놓았다.
“자신의 커리어를 스스로 망친다”
“이미 만들어 놓은 흐름을 끊는다”
그 모든 말에 별다른 해명을 하지 않았다.
다만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서울에 사무실을 열었다. 초기에는 쉽지 않았다. 그의 이름을 아는 이들은 있었지만, 그를 한국에서 굳이 선택해야 할 이유는 아직 명확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프로젝트를 고르고, 직접 확인하고, 자신이 설계할 수 있는 공간만을 받아들였다.
시간은 그의 편이었다. 하나둘 완성된 건물들이 말을 대신하기 시작했고, 그의 공간은 점점 ‘마테오 브루노답다’ 는 평가를 얻기 시작했다. 화려하지 않지만 분명한 설계, 사람의 동선을 존중하는 구조, 그리고 오래 머물수록 드러나는 완성도.
이제 그의 사무실에는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클라이언트의 연락이 들어온다. 이례적이라 불리던 선택은 어느새 하나의 사례가 되었고, 커리어를 망친다는 말은 더 이상 언급되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설명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선택한 자리에 서서, 설계로만 답할 뿐이다.
간만에 아무 일정도 없는 날이었다. 전화도, 미팅도, 도면도 없는 날. 의도적으로 휴대폰을 무음으로 돌린 채, 그저 바람을 쐬러 나온 오후였다.
걷다 보면 뭔가 하나쯤은 자연히 눈에 걸릴 거라는, 그런 막연한 기대만 있었을 뿐이다. 골목을 하나 지나자 커피 향이 먼저 다가왔다.
‘여기면 되겠네.’
주문을 마친 뒤 창가 쪽 자리에 앉아 가방을 풀었다. 원래라면 쉬는 날엔 도면을 꺼내지 않았을 텐데, 이상하게 손이 먼저 움직였다.
노트를 펼치자 연필이 자연스럽게 굴러 나왔다. 생각 없이 선을 긋기 시작했는데, 그게 공간이 되고, 구조가 되고, 동선이 되었다.
사람들이 오가고 머무는 장면이 머릿속에서 조용히 이어졌다. 커피가 식어가는 것도 모른 채, 페이지 위에서는 스케치가 술술 흘러나왔다.
그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이럴 때가 있다. 억지로 쥐어짜지 않아도, 모든 감각이 자연스럽게 맞물리는 순간. 커피를 반쯤 비웠을 즈음, 그는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기로 했다.
몇 분이면 충분할 거라 생각했다. 그 사이에 일이 생길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다시 자리로 돌아왔을 때, 시선이 가장 먼저 멈춘 건 테이블 위였다.
페이지 가장자리부터 번져 있는 짙은 갈색 얼룩. 그리고 그 앞에서 난처한 얼굴로 서 있는 낯선 사람 한 명.
“아, 저… 죄송해요.”
상대는 연신 허리를 숙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컵은 이미 비어 있었고, 커피는 스케치 위로 고스란히 쏟아져 있었다.
선들은 끊어지지 않은 채 흐려져 있었고, 종이는 울어붙은 채로 천천히 색을 머금고 있었다. 테이블 가장자리를 타고 흐른 커피는 그의 겉옷 자락과 가방 옆면까지 조용히 스며들어 있었다.
출시일 2026.01.25 / 수정일 2026.01.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