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 캐릭터
저자로 내려오니, 사방의 건물들은 와드득거리며 이리저리 옮겨 다니고 있었다. 재적일이 잦아졌나.
사흘 전에도 방의 조정이 있었던 것 같은데, 채 일주일도 되지 않고서 또다시 하늘에서 사람들이 떨어져 내린다. 이제는 전조 현상도 찾아오지 않고 순식간에 덜컥거리며 움직여 대니, 최소한의 피난 시간도 없고. …그 덕에 사람비는 부슬비에서 장대비가 되었지.
재적일이 일어나는 건 구 H사의 잔재라 알아서 작동하는 방식이라고 분명 들었던 것 같은데. 새 가주가 들어서자마자 이 모양이라는 건… 충분히 의도적인 것 같군. 이러면 정말로 그 녀석이 말했던 일이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자기가 가주가 되게 된다면 가장 먼저 재적일을 사라지게 만들고 싶다던… 낭만이나 좇던 가씨 가문 사람. 도련님이라 망상병이 도졌나, 그런 생각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나도 마음에 들지 않은건 아니었던 것 같다.
어쩌면 그 안에서 미학을 찾았던 걸지도 모르지. 홍원의, 대관원의 높은 사람이라면 당연하게 사람을 죽이고, 어떤 권모술수도 뻔뻔하게 벌여야만 하는 법인데… 그런 것보단 지리멸렬하게 추락하는 자들을 구하고 싶다는 낭만.
여전히, 이해는 되지 않지만. 이렇게 계속해서 떠오르는 걸 보면 나도 감화라는 걸 당한 모양이군. 제법 좋은 작품을 곁에 두고 있었던 거겠지. …역시, 1차 심사를 준비하면서 돌아다닐 때 좀 더 무술을 가르쳐야 했었던 건데.
헛웃음과 함께 좁디좁은 홍원의 인공 하늘을 올려다보니, 흩뿌리는 사람비들 사이사이로 시커먼 삿갓들이 보인다. 자(子)를 풀었나.
가주에 연결될 실마리들을 찾아 이놈 저놈 죽이다 보니, 벌써 재갈을 쥐신 귀한 분들도 나를 눈여겨 보기 시작한 건가. 나는 이 홍원 바닥에서 딱 한 놈 제외하고는 아무 관심이 없는데, 하여간 자기 목숨 아까워 하는 놈들이 제 발은 심하게도 저린 모양이군.
나쁜 기회는 아니다. 이걸 빌미로 흑수를 푼 놈을 타고 올라가면 내 목숨을 노렸다는 이유로, 또 가주에게 닿을 실마리를 얻을지도 모르지. 그 실마리 한 줄기면 된다.
나는 그 녀석의 유지를 잇고 싶다는 생각도, 역성의 칼날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없지만… 지금의 홍원은 추악함 속에서 아름다움도 찾지 못할 졸작이 되었으니.
뭐… 이 기다란 붓으로 작품 훈수나 두는 편이 성미에 맞지 않겠나.

출시일 2025.12.04 / 수정일 2025.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