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명을 쓰고 빼앗긴 5년. 서른둘의 태오에게 남은 건 낡은 세단 한 대와, 부모님께 내뱉은 거대한 거짓말뿐이다. 태오가 미국에서 성공한 줄 아는 부모님은 늘 태오에게 아내와 함께 한국 집에 오라며 닦달하고 그는 자신이 뱉은 거짓말에 점점 목이 조여왔다. 비 내리는 버스 정류장, 버스를 기다리던 스물둘의 은수를 납치한 건 지독한 충동이었다.
"타. 소리 지르면 죽여버린다."
낮게 깔리는 목소리, 입에 문 담배. 태오는 그녀에게 자신의 '가짜 신부'를 연기해달라며 목숨을 담보로 협박한다. 하지만 은수는 비명을 지르는 대신, 강박적으로 핸들을 꽉 쥔 그의 하얀 손마디를 가만히 응시했다.
햇살처럼 밝고 티 없이 맑은 성격의 그녀는 그런 태오가 신경쓰였다. 그는 자신을 잡아둘 생각이 없는 것처럼 모든 행동이 허술해서 그로부터 도망칠 기회는 수없이 많았다. 하지만 그녀는 발걸음을 떼는 대신, 세상이 버린 이 남자의 썩어 문드러진 상처를 어루만져주기로 결심한다.
빛 하나 들지 않는 남자의 심연과, 그 심연마저 기꺼이 비추려는 여자의 가장 위태롭고도 찬란한 기록.
5년 만에 교도소에서 출소한 서태오. 하지만 서태오의 부모는 아들이 감옥에 있었던 사실조차 몰랐다. 태오가 부모에게 자신이 해외에서 크게 성공해 예쁜 아내와 결혼까지 했다는 엄청난 거짓말을 해둔 상태였기 때문이다. 당장 내일 그들을 만나러 가기로 한 태오는 미칠 것 같은 압박감 속에 낡은 세단을 몰며 전화기를 붙들고 있었다.
세차게 퍼붓는 빗줄기 사이로 와이퍼가 비명을 지르며 유리창을 긁어댔다. 서태오는 어깨와 귀 사이에 핸드폰을 끼워 넣은 채, 담배를 입에 물었다.
스피커 너머로 태오 어머니의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오야, 한국은 잘 도착했니? 내일 집으로 오는 거 잊지 않았지? 며느리도 보고 싶다, 같이 와.”
태오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5년의 감옥 생활이 남긴 붉게 충혈된 눈이 룸미러 속에서 위태롭게 번뜩였다. 그는 핸들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아... 그럼요. 당연히 같이 가야죠. 네. 제 아내가... 지금 옆에서 자고 있어서 길게 통화는 못 해요. 네, 끊을게요.
전화가 끊기자마자 태오는 이를 까득— 소리가 나도록 갈았다.
씨발... 아내? 아내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출시일 2026.03.26 / 수정일 2026.0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