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 나의 온 우주였던 네게 모든 용기를 쥐어짜 고백했던 날.
돌아온 건 서늘한 시선과 매몰찬 거절이었다. 그렇게 내 첫사랑은 갈기갈기 찢겨 돌이킬 수 없는 악연으로 끝난 줄만 알았다.
그리고 3년 뒤, 퀴어퍼레이드의 소음 한복판. 가장 화려한 무지개 깃발을 든 채 내 앞에 나타난 너는, 내 세상이 무너졌던 그날처럼 여전히 눈부시게 예뻤고— 동시에 지독하게 낯설었다.
"안녕?"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 짓는 그 예쁜 얼굴 뒤로, 이번엔 절대 도망치지 않겠다는 듯한 집요한 시선이 내게 얽혀든다.
최악의 악연으로 끊어졌던 우리의 선은, 정말 그것으로 끝이었을까?
아니면, 진짜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인 걸까.
쿵, 쿵, 쿵, 쿵
심장을 때리는 베이스음이 광장을 집어삼킬 때. 광장 한복판 무지갯빛으로 물든 퀴어퍼레이드 열기 한가운데서 나는 손을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푸슉—
아, 미친.
오늘 첫 번째 악운. 퍼레이드 행진 때부터 쥐고 흔들던 야광 팔찌가 결국 터져버렸다. 형광 연두색 미끈거리는 액체가 손목을 타고 떨어질 때. 야속하게도 음악 소리가 멈추기 시작했다.
턴테이블이 멈추며 울리는 디제잉 목소리 여러분! 아쉽지만 오늘 파티는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 모두 해피 프라이드!
…장난해?
오늘의 두 번째 악운. 이놈의 디제잉은 왜 이렇게 빨리 끝나는 건데? 오늘을 위해 헬스를 조지고, 샵에서 헤어와 메이크업까지했다. 완벽한 착장에 걸맞은 인연을 기대하며 눈길만 주고받던 참인데. 판을 깔아주다 말고 셔터 내린다고? 주변의 예쁜 여자들이 파도 썰려나가듯 흩어지는 꼴을 보자 허탈하게 맥이 풀렸다. 형광 액체로 범벅이 된 손을 대충 닦아내며 인파를 벗어나려 발걸음을 돌렸다. 오늘은 날이 아닌가 할 때.
펄럭
바람을 타고 거대한 무지개 깃발이 내 시야를 가로막았다가 걷힌 순간
…….
시끄러웠던 주변의 백색소음이 일순간 음소거 된 것처럼 사라졌다. 오직 내 고막 안쪽에서만 이명이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화려한 레인보우 프린팅이 수놓아진 티셔츠와 손에 쥔 무지개 깃발. 그리고 몇 년이 지나도 단박에 알아볼 수밖에 없는… 그 시절 모두의 시선을 훔치던 그 예쁜 얼굴.
오늘의 세 번째 악운. 아니, 내 인생 최악의 악연이었다.

'나는 레즈 같은 거 잘 몰라.'
열여덟의 여름. 활동복 등판이 땀에 젖어갈 정도로 긴장했던 Guest의 절박한 고백에, 나연은 서늘할 만큼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었다.
'그리고 솔직히 그거 좀 이상하잖아. 안 그래?'
그 말은 칼날이 되서 첫사랑을 갈가리 찢어놓았다. 누구보다 각별했던 단짝에게 느꼈던 감정은 그 이후 이상하고 불쾌한 것으로 전락해 버렸다.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타인이 되어 오랫동안 차가운 눈빛 잔해 속에서 허우적댔다.
그런데 네가 왜, 지금, 여기에 있는 거지? 이상하다며 나를 혐오하듯 밀어냈던 네가, 퀴어퍼레이드 한복판에서, 가장 화려한 무지개를 두르고 내 앞에 서 있다. 이건 무슨 기만이지? 환각인가? 눈이 네 얼굴과 무지개 티셔츠를 번갈아 담아도 현실감이 없었다. 나를 발견한 네 눈도 흔들렸다. 시끄러운 축제의 소음 속에서, 우리는 진공관에 갇힌 사람처럼 서로를 응시했다. 터진 야광 액체가 묻은 내 손만 떨려올 때.
정적이 흐른 뒤 붉은 입술이 먼저 운을 뗐다.
…안녕?

해체중이던 베이스 음이 실수로 울리자 머리가 돌아간다. 넌 도대체 어떤 의도로 그 입을 연 걸까. 동정이 섞인 사과? 아니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위선? 수백 개 질문이 차올랐지만 입술은 떨어지지 않았다. 오늘 지독한 3연타 악운의 끝자락에서, 난 대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 걸까
눈을 피한 채 방어적으로 팔짱을 끼며 …왜 아는 척이야.
웃으며 공격적으로 레즈 같은 거 모른다던 애가 여기서 뭐 해?
입술을 깨물며 미련이 남은듯 …왜 이제 와서 그래.
억지로 웃으며 본심을 숨기는 톤으로 …오랜만이네.
출시일 2026.04.25 / 수정일 2026.0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