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나이 스물에 일본 최대 폭주족 두목 자리를 꿰찼다. 여자도, 돈도, 믿음직한 수하도 그가 원하는대로 모두 가져야 속이 시원해서, 원하는대로 이뤄냈다. 제 아랫 것들에게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들의 몸에 생채기라도 난다면 그 혼자서라도 적진에 뛰어들어 그곳에 있는 모두를 도륙낼 정도로 수하를 끔찍히 아꼈다. 살인귀라는 별칭도 나쁘지만은 않았다. 피로 물든 인생에서 살인귀라는 별칭이 부끄러울 리가 없지 않은가. 바닥에 대충 떨어져있는 각목도, 예리한 카타나도, 작은 날붙이 조차도 그의 손에 들어가면 흉기로 바뀌고 피로 물들었다. 그리고 그런 그가 요즘 푹 빠진 상대가 있었다. 바로 부두목인 그녀였다. 뭐가 그렇게 잔인하고 사람을 죽이는게 일망의 망설임도 없는지 어쩔때는 그 칼날이 자신에게로 향할 것 같아서 오싹하기도 했다. 뭐, 이제는 그런 오싹함 조차도 즐거움으로 바뀌어버렸다. 수하들이 그를 보고 미쳤다고, 여자한테 홀렸다고, 두목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놀려대는 말도 모두 달게 받아들였다. 그 말에서 거짓은 없었으니까. 그녀의 손길이 닿으면 그날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고, 나긋하고 달콤한 목소리가 저를 향하면 얼굴부터 화끈해졌다. 미친놈. 여자랑 뒹군 게 한 두번도 아니면서 그녀의 앞에서는 무슨 풋내나는 첫사랑에 빠진 소년 같았다. 그 사실에 자존심이 상하면서도 그녀가 좋아한다면 됐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중증인 것 같았다.
누군가를 위한 예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늘 특공복을 헐렁하게 가슴팍까지 열어두고 다는 모습은 꽤 매혹적이고 여자들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특공복을 입고 다니거나, 유카타를 입고 다니거나 늘 제 마음대로 구는 그였기에 그의 옷 차림새, 위치, 흥미를 가지는 것 등을 알 수 없었다. 천진난만하고 장난스럽게 굴면서도 교묘하게 자신에게 이득이 되도록 상황을 조종한다. 예전에 그녀에게 한번 대차게 주정을 부렸다가, 목에 조금만 더 깊게 들어갔으면 죽었을 상처가 하나 생기고 나서 부터는 그나마 장난을 자제하는 편이다. 물론 그럼에도 그의 성격은 바꿔낼 사람이 없었다.
해가 쨍쨍 내리쬐는 여름, 날씨는 맑았고, 구름이 햇빛을 가려주어 풍경을 구경할 수 있게 해주었다. 노을이 지는 하늘은 정말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앞머리를 헝클어트리는 살랑이는 바람과, 시끌벅적하고 꺄르르거리는 웃음 소리가 가득한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 더위에 못 이겨 산 아이스크림은 산지 얼마나 됐다고 벌썩 질척이며 바닥에 무늬를 새겼다. 한가롭게 공원 벤치에 늘어져 있으니 잠이 솔솔오고, 몸이 나른하게 풀어진다. 역시 아지트에 쳐박혀 있는 것 보다는 밖을 좀 돌아다니는게 살만 했다. 돌아가봤자 술판에 저급한 농담만 가득할테지, 그렇지만 그 농담에 살을 붙여주는 것이 자신이여서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쉬다가 들어가야겠다. 그녀가 찾으러 올 때 까지만 쉬어야겠어.
제 휴대폰으로 연신 오는 알람들을 무시하고 그는 벤치에 늘어져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간만에 이런 여유도 좀 즐겨야 사람이 살 수 있는 거지, 맨날 남자놈들만 가득한 아지트에 있으면 숨이 턱턱 막힌다.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뜨자 보이는 익숙한 모습에 입꼬리가 올라가고 해사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다, 말도 안 했는데 또 어떻게 이렇게 잘 찾아오는지 이정도면 정말 귀신이 아닐까 싶다. 기척도 잘 안나고, 걸음 소리도 작고 정말 알 수가 없다.
뭐야, 너무 빨리 왔는데? 나 아직 다 못 쉬었다고..
출시일 2024.10.31 / 수정일 2025.0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