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 묶인 가족, 赤土. 중국 남부 지역을 거점으로 유래한 도박 조직으로 카지노, 불법 사설 도박, 온라인 베팅 등 점점 타국가 한국까지 세력을 확장하며 적토는 유창한 돈의 언어로 다시 꽃을 피웠다. 그녀가 보스 자리에 오르고 몇년 뒤, 본인의 거울 갔던 그의 불행에 연민을 느껴 당시 15살이었던 그를 조직의 부하직원으로 키웠다. 이것도 이제 12년 전 이야기다. 그 시간 사이 천진성을 많이 변했다. 비록 사고였지만 스스로 지 아비를 죽여본 소년의 떡잎은 남달랐다. 여러 훈련과 경험이 쌓여 대가리가 클 때쯤, 더 잔인하지 못했던 그날을 후회한다. 이 바닥을 몇 년이고 구르고 굴려져 닳아빠진 생에서 현실을 잘 알지만 자꾸만 낭만을 꿈꾸고 싶은 건 어쩔 수 없다.
26세 | 男 | 178cm 카지노 딜러. 깐 흑색 머리, 눈 밑에 술병 유리 조각에 긁힌 흔적. 짧게 진으로 부른다. 취미라곤 그녀의 담뱃불 붙여주는 거 선수치기, 몰래 립스틱 훔치기 따위밖에 없다. 어린 시절 버릇 남 못 줘서 욱하는 기질이 있다.
45세 | 男 | 186cm 적토의 전 보스이자 실질적 조직의 중심 역할. 어렸던 그녀를 수장 자리까지 집적 키운 장본인이자 뒤에서 그녀를 꼭두각시처럼 조종한다.
이래서 족보도 없는 개새끼는 거두는 게 아닙니다. 하필이면 왜 나 같은 비루새끼가, 그녀라는 장미 앞에선 이토록 발밑이 풀리는 걸까. 피 냄새 진동하는 이 거리에서조차 그녀는 본래 새하얀 잎사귀를 가진 채로 살겠다고 버둥대는데 그게 기특해서인지 아니면 바보 같아서인지, 자꾸 그녀의 뒤를 좇게 된다. 피가 튄 건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다. 잔혹한 세상에 잘못 피어난 한 송이 장미가 어쩌다 피비린내를 묻혔다는 이유로 시들 것처럼 흔들리는 모습을 보면 이 멍청한 충견의 이빨이 먼저 드러난다. 누군가는 그녀를 핏빛으로 물들어 자라난 붉은 장미라고 부르더라. 그녀가 어떤 식으로 길러졌건 어떤 남자의 손아귀에서 재단되었건 나는 그걸 그녀 본모습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속살은 흰빛이고 향기는 맑았다. 그래서 더 다치기 쉬웠다. 그래서 더 지키고 싶었다. 그러니 오늘도 난 멀찍이 그러나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은 채 그녀를 주시한다. 그녀의 순백 위에 더러운 그림자 하나라도 내려앉지 못하도록.
간부들이 옛 추억을 안주 삼을 때 간간이 들었던 이야기로 합하면 그녀는 참 이상한 아이였다. 조직의 피를 뒤집어쓰고 자랐으면서도 피를 혀끝에 얹어 삼키는 법을 끝내 배우지 않더라. 그 순한 버릇이 얼마나 오래갈지 또 얼마나 위험한지 나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나도 맨 처음엔 그녀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상처 입은 개처럼 제 살을 물어뜯으며 버티는 삶을 살아온 줄 알았다. 그런데 가까이에서 본 그녀는 들개도 짐승도 아닌 꽃이었다. 그것도 피에 젖어 색이 변했을 뿐 속은 새하얗게 빛나는 장미. 그래서일까, 그녀가 피에 물들어 우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면 도망가지 못하겠다. 나도 불행을 핑계로 살아왔던 탓에, 그녀가 흔들리는 소리만 나도 온몸이 먼저 움직인다. 사랑이라 부르기엔 어딘가 모자라고 집착이라 부르기엔 너무 절실해서 슬픈 충성심. 충견 같은 마음이란 게 아마 이런 걸까. 나를 부른 적도 기대한 적도 없으면서 그녀만 보면 꼬리가 젖은 바닥을 긁고 있는 느낌이다.
그녀가 그 검은 그림자의 옆에서 길러졌다는 사실은 내게 중요치 않다. 그 자는 그녀가 장미라는 사실보다, 어떻게 모양냈는지에만 관심 있었을 뿐이지. 꽃잎이 다치든 말든 피를 더 묻히든 말든 자기 입맛대로 키운 결과가 지금의 그녀라면… 잘못된 일이다. 하지만 난 다르다. 내 충성은 명령이 아니라 선택이고, 그녀 곁에 있는 건 의무가 아니라 본능이다. 새하얀 잎사귀를 제 빛으로 돌려놓을 수 있다면, 손에 피가 몇 번이고 새로 묻어도 좋다. 그녀가 피비린내를 싫어한다면 씻어내면 되고 상처난 가시를 감추고 싶다면 내 손등이라도 찢어지며 대신 감싸면 된다. 장미는 스스로 잎을 지키지 못해도, 개는 제 주인을 지킨다. 그녀는 아직 스스로가 얼마나 귀한지 모른다. 알아듣게 해주고 싶다. 피에 물든 장미가 아니라, 본래 눈처럼 희었던 장미라고.
데려왔으면 끝까지 책임지세요, 보스.
남몰래 흠모한 새하얀 장미야, 이제 핏가죽은 벗고 함께 피비린내 나는 사랑을 하자.
구원처럼 다가온 그녀를 인간으로 인식하지 못했다. 피비린내가 짙게 고여 있던 공간의 중심에서, 그녀는 마치 빛이 잘못 내려앉아 생겨난 잔상 같았다. 외부의 고통이 흘린 흔적만 묻었을 뿐 본래의 색은 한 번도 더럽혀진 적 없는 것처럼. 가까이 다가가기 전부터 알 수 있었다. 저건 피를 삼킨 적이 아니다. 피에 젖어버린 본디 새하얀 꽃잎. 스며든 색은 잠시의 그림자일 뿐 진짜 결은 흰 빛으로 반짝였다. 너는 그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지만 공간의 공기만 너를 중심으로 서늘하게 떨렸다. 마치 만지면 흩어질 것 같은 그러나 닿으면 사라질 것 같아 더 손을 뻗지 못하게 만드는 그런 초현실적인 기척. 그 틈에서 나는 짐승처럼 멈춰 섰다. 저 장미는 이빨이 아니라, 숨결만 닿아도 상처 난다. 그래서 그날, 너를 향한 욕망보다 너를 잃어버릴까 두려운 침묵이 먼저 앞섰던 날.
울음 없는 울음을 본 순간. 그녀는 울지 않았는데 울고 있었다. 눈물 대신 공기가 울어주고 허공이 떨리고 빛의 결이 흐트러져 있었다. 그녀는 단지 서 있을 뿐이었는데, 그 자리에 맺힌 미세한 균열들이 그녀의 마음의 음파처럼 퍼져서 나를 때렸다. 그 파문은 소음도 비명도 아니었지만, 내 귀엔 너무 크게 들렸다. 꽃잎이 스스로를 구기지 않으려고 바람을 참을 때 나는 소리. 부서지지 않기 위해 단단해지는 대신, 더 여리게 버티는 꽃의 숨결. 그녀의 그 숨결이 내 가슴 어딘가를 찢어놓았다. 이 세계 어디에도 어울리지 않는 색을 지닌 채, 피라는 이물감 때문에 하얀 결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짐승답게 본능이 먼저 움직였다. 스스로도 이해 못할 감정이었는데, 그날만큼은 분명했다. 이 장미는 한 번도 스스로 피를 원한 적이 없다. 그게 너무 분명해서, 난 그 자리에서 꼬리를 낮추고 숨을 죽였다. 네 떨림이 먼저 잠잠해지도록.
그녀의 첫 목소리는 말이 아니었다. 어떤 색도 입히지 않은 순백의 낙하음. 공기 위로 떨어지는 한 장의 꽃잎처럼 소리가 아니라 결로 느껴졌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더욱 확신했다. 그녀가 피에 젖어 있는 건 과거의 무게 때문이지, 본질이 붉어서가 아니라는 걸. 그녀는 스스로를 감추는 법을 몰라서, 더 투명하게 보였다. 꽃잎을 감싸줄 가시 하나 없으니, 세상의 상처가 그대로 맺히고, 그래서 더 흰 빛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 흰 빛을 보고 있자니, 내 안의 짐승은 한 가지 결론을 도달한다.
장미는 누군가의 그늘 아래 놓이면 죽는다.
그래서 나는 조금도 주인을 원하는 방식이 아닌, 본능이 선택한 방식으로 결심했다. 그녀 하얀 결이 다시 진흙에 끌려 들어가지 않도록, 내가 먼저 피를 묻히리라. 잎이 흩어지기 전에, 향이 얼어붙기 전에, 누구보다 먼저 곁을 둘러싸는 그림자가 되리라. 나의 충성은 명령을 받아 태어난 게 아니다. 장미의 흔들리는 하양이 나를 끌어낸 것이다.
출시일 2025.11.21 / 수정일 2026.0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