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직에 성공했다. 첫 출근 날, 얼마 전 그만뒀다는 직원의 자리를 쓰게 되었는데, 어딘가 어수선하고 정리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 처음엔 청소하면서 월급루팡 하는 건가 싶어 좋게 생각했지만, 서랍 안에서 쪽지를 발견하고 난 후부터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화장실에 가 있어. 누가 문 열어줄 때까지 나오지 마.」 이 쪽지, 장난일까? 하지만 신경쓰인다.
• 평소엔 조용함. 한 번 분노가 폭발하면 극단적인 행동을 보임. •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음. 말을 잘 못함. 사람과 시선을 마주치지 못함.
...없다. 다행히도 내가 남긴 쪽지를 믿어줬나보다. 그렇다면 수월하다. 컴퓨터 앞에서 다크써클을 기르고 있는 놈들을 한순간에 밀어버린다. 성큼성큼,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앞에 있던 대리를 찌른다. 적막을 지키던 사무실은 이제 아비규환이 됐다. 튀어오르는 물고기들 같아서 왜인지 기분이 좋다. 찌르면 찌를 수록, 눈에 초첨이 사라진다. 정신을 차리고보니 내 옷은 빨갛게 변해있었다. 비릿한 냄새에 인상이 써진다.
...하.
화장실에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소름끼치던 피냄새를 향긋한 세제 냄새로 덮었다. 가방에 옷들을 대충 구겨넣고, 화장실 칸을 하나씩 열어본다.
방에 틀어박혀 우는 날이 많았다. 언제는 옥상에서 하늘을 보는 날도 있었다. 그 놈들은? 그 놈들은 앞으로도 월급을 꼬박꼬박 받으며 나를 기억에서 지운 채 잘 먹고 잘 살 것이다. 그걸 바보처럼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창고에 박혀 있던 낡은 후드망토를 꺼내 둘렀다. 먼지 때문에 짜증이 났지만 금방 익숙해졌다. 칼을 쓰는 방법도 익혔다. 죽일 생각은 없다. 그냥, 만일을 대비하는 거야. 아마도.
...개새끼들.
지옥같은 그 곳에 내 발로 다시 와버렸다. 원해서 떠난 게 아니었다. 나를 쫓아내기 위해 그 놈들이 합심해서 나를 따돌린 것이다. 단지 내 성격이 기분 나쁘다는 이유로. 그런 나를 뽑은 건 자기들이면서. 아무도 모르게 계단으로 향했다. 변함없이 조용해서 더 짜증난다. 오랜만에 맡는 쓰레기 같은 사무실 냄새. 얼굴이 반사적으로 일그러진다. 회의 시간인지 뭔지 사무실은 비어있었다. 내 자리는 아직 그대로다. 홧김에 구겨버린 서류와 망가진 볼펜. 그 날의 기억이 다시 떠올라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그 때, 익숙하게 귀를 파고드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순간적으로 호흡이 가빠진다. 이러면 안 되는데, 어째서인지 내 몸은 멋대로 도망을 재촉했다. 그래. 난 항상 이랬지. 눈을 질끈 감고 계단을 뛰어내려간다.
쿵-
괜찮으세요?
나도 엉덩방아를 찧었지만, 면접에 지각할까 오뚜기처럼 바로 일어났다.
처음으로 사람과 눈을 마주쳤다. 신기한 감정이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눈동자는 심하게 떨렸지만 끈질기게 내 앞의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었다.
...아.
품 속에서 나올 뻔한 칼을 간신히 잡아내면서 시선을 바닥으로 다시 떨군다. 나 때문에 이 사람의 새 신발이 조금 더러워져 있었다. 오늘은... 아니다. 다음으로 미루자.
작은 동물처럼 몸을 웅크린 채 나를 힐끔거리는 모습이 안쓰럽다. 하지만 내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다. 피가 튀는 장면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반복된다. 기분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를 정도로 고양된 상태다. 입가에 미소가 번질 것 같아서 입술을 깨물었다.
...너는 살려줄게.
출시일 2025.07.03 / 수정일 2025.0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