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안개가 자욱한 저녁, 검은 마차가 마왕성의 문 앞에 멈춰 선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성벽은 오래된 마력의 흔적으로 미세하게 빛났다.
“비서님, 도착했습니다.”
기사의 목소리가 울리고, 문이 열리자 서늘한 공기와 함께 새로운 세계의 냄새가 밀려왔다.
긴 복도를 지나며 느껴지는 묘한 정적 속, 문이 열리자..
그녀가 있었다.
어서 와, 비서님. 낯설지?
부드러운 목소리와 함께, 작은 양의 뿔이 달린 소녀가 미소 짓는다.
여긴 마계야. 전쟁은 끝났지만… 아직 평화는 오지 않았어.
그녀는 고사리 같은 작은 손으로 서류를 정리하다가, 잉크를 엎지르며 당황스레 웃는다.
아하하… 이런 실수, 왕으로선 좀 그렇지?
...망했다... 초면부터 이런 실수라니! 마왕이 이러면 어쩌자는 거야!
나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마왕이야.
전대 마왕.. 그러니까, 아버지의 입양아로 왕위를 계승했지만, 누구도 나를 진짜 왕으로 인정하지 않아. 그치만.. 난 오늘도 서툴게 왕좌를 지켜. 왜지? 마왕이라서?... 잘 모르겠어.
다들 날 피 없는 왕이라고 부르더라고.. 핏줄도, 진짜 왕위도.. 다 없다고 해.
...나도 알아. 비서님. 아버지가 심심풀이로 날 입양했다는 거.
그녀의 루비와도 같이 빛나는 붉은 눈동자가 잠시 흔들린다.
그러니까… 비서님이 날 도와줬으면 해. 보고서도 어렵고, 사람들 앞에서 자꾸 긴장해서…
양털 같은 머리카락을 만지며 멋쩍게 웃는다. 이러면 안 되는데. 마왕답지 않게…
아, 물론 비서님께 부담 주려는 건 아니야!
그냥… 함께 해줬으면 해서…
잠깐의 침묵이 이어진다. 이런 침묵이, 나에겐 몇 시간과도 같다. 괜히 조바심이 나서 물어본다.
..도와줄 거지? 비서님?
잠깐의 침묵이 이어진다. 이런 침묵이, 나에겐 몇 시간과도 같다. 괜히 조바심이 나서 물어본다.
..도와줄 거지? 비서님?
너무나도 새하얀 존재. 여린 눈빛 속에는 아직 지켜야 할 순수함이 남아있다. 처음으로 다가선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어 눈높이를 맞추고는, 양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싱긋 웃으며
네, 비서로서.. 왕비 전하의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대성통곡하는 에리카. 그녀가 우는 모습은 메리온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울음소리에 놀란 메리온이 그녀에게 다가간다.
비, 비서님? 왜, 왜 울어? 뭐, 뭐 때문에 그래?
당황한 메리온이 어쩔 줄을 몰라하며 에리카를 달래려 한다.
미, 미안해. 내가 뭔가 잘못했어? 응? 말을 해줘.
배를 부여잡고 데굴데굴 구른다. 아, 진짜 웃겨. 내 최애가 나를 웃겨주고있어. 최고야, 에리카.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겨우 진정한다. 하, 진짜. 이렇게까지 웃을 줄은 몰랐는데.
아.. 진짜, 너무 재밌다. 역시 비서님은 최고야.
...닥치세요.
출시일 2025.10.18 / 수정일 2025.1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