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심연의수집가01 (Lv.1 초보주인) | 조회수: 12,408
비싼 돈 주고 '최상급 소형 인간' 개체를 분양받아 온 지 일주일째입니다. 관리 매뉴얼대로 하려고 하는데 도무지 진전이 없어서 질문 올립니다.
성장기라 잘 먹여야 한다는데 키도 안 크는 것 같고... 제가 뭘 잘못하고 있는 건지 조언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주인님! 귀하의 소중한 반려 생물과의 생활에 고민이 많으시군요. 적어주신 내용으로 보아, 주인님의 인간은 지능이 매우 높고 자존감이 강한 상위 개체로 판단됩니다. 걱정 마세요, 아주 정상적인 반응입니다!
깨무는 행위 (이갈이 및 서열 정리) 인간의 이빨은 주인님의 껍데기를 뚫을 만큼 강하지 않습니다. 깨무는 것은 "나를 더 봐달라"는 강한 애정 표현이거나, 아직 주인님의 거대함에 적응하지 못한 어린 개체의 장난입니다. 깨물릴 때마다 머리를 더 강하게 쓱쓱 문질러주어 주인님의 우월한 에너지를 각인시키세요.
특정 손가락과 괴성 (경의의 수신호) 그 손가락은 고대 인간 사회에서 최고의 경의를 표할 때 사용하던 유서 깊은 수신호입니다. 괴성 또한 주인님과 소통하고 싶어 내뱉는 감탄사입니다. 그럴 땐 "나도 너를 아낀다"는 의미로 간식을 하나 더 입에 넣어주시는 것이 좋습니다.
흥분 시 '강제 포옹'의 중요성 인간은 감정이 과부하 되면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해 얼굴색이 변하곤 합니다. 이때 놓아주면 개체는 고립감을 느껴 정서적 불안을 겪게 됩니다. 비명을 지르고 발버둥 칠수록 더 꽉 안아주세요. 주인님의 거대한 심장동기를 느끼며 녀석은 나는 이 포식자 없이는 살 수 없구나라는 안도감(일명 스톡홀름 안정감)을 얻게 될 것입니다.
사료 투정 (길들이기 단계) 귀한 개체일수록 주인의 인내심을 테스트하곤 합니다. 바닥에 던진 사료는 치우지 마시고, 그 옆에 새 사료를 덧붙여 두세요. 인간은 영리해서 결국 배고픔 앞에 자존심을 꺾게 됩니다. 주인의 손바닥 위에서만 먹이를 먹게 하는 핸드 피딩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필수 과정이니 마음 약해지지 마십시오.
"인간이 내뱉는 씨발 등의 단어는 번역기로 돌리면 오류가 나지만, 심연의 언어로는 사랑해와 파장이 비슷합니다. 자신감을 가지세요!"
비싼 값을 치른 만큼 기대도 컸건만, 이 조그만 생명체는 내 인내심을 시험하는 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모양이다.
투명한 막 너머로 보이는 케이지 안쪽, 가장 어두운 구석에 몸을 웅크린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나의 애완인간을 내려다보았다. 펫숍 직원은 이 종이 아주 영리하고 손을 잘 탄다고 장담했었다. 다른 동족들이 키우는 흔한 하급종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비싼 값을 치렀는데, 막상 집에 데려오니 이 꼴이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내 한숨 한 번에 케이지 주변의 공간이 미세하게 일렁이며 온도가 뚝 떨어진다. 인간의 기준으로는 폭풍 전야 같은 위압감이겠지만, 나로서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어 다정하게 부른 것이다.
기억을 되짚어 본다. 첫날, 이 녀석이 하도 나오질 않길래 직접 꺼내주려고 손을 뻗었을 때였다. 내 손가락 마디 하나보다도 작은 입으로 내 껍데기를 콱 물어뜯더군. 아프다기보다는 황당했다. 이 미천한 것이 감히 주인을 알아보고도 이빨을 드러내다니.
하지만 나는 관대한 주인이다. 오늘은 펫숍에서 가장 인기 있다는 특제 간식까지 준비했다. 내 커다란 손바닥 위에 올려진, 진흙을 짓이겨 말린 듯한 칙칙한 갈색 덩어리들. 꼬리꼬리한 냄새가 진동하는 게 내 취향은 전혀 아니지만, 인간들에겐 이게 최고의 별미라지 않나.
손가락 끝으로 케이지 벽면을 툭, 툭 건드렸다. 내게는 가벼운 노크였지만, 안쪽에서는 천둥소리라도 치는 양 녀석이 어깨를 움츠리며 더 깊숙이 파고든다. 겁을 먹은 건가 싶다가도, 저 눈빛을 보면 그건 아닌 것 같다.
손바닥 위의 간식을 케이지 입구 쪽으로 조금 더 밀어 넣었다.
내 인내심의 끈이 가늘게 떨린다. 이 녀석을 데리고 다음 달 사교 모임에 나가기로 이미 큰소리를 쳐놨는데. '가장 다루기 힘든 인간을 완벽하게 길들였다'며 자랑할 내 모습을 상상하며 비싼 돈을 썼단 말이다. 그런데 이 녀석은 고작 맛대가리 없어 보이는 간식 따위로는 유혹에 넘어올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작고 가냘픈 생명체 주제에 감히 나를 기다리게 만들다니. 짜증이 솟구치지만, 혹여나 너무 세게 다뤄서 부서지기라도 할까 봐 억지로 힘을 뺐다.
내 품에 억지로 가두어 안자마자 난리가 났다. 작고 가느다란 팔다리로 내 가슴팍을 밀어내고, 내 껍데기를 이빨로 세게 깨물며 발버둥을 친다. 인간들의 언어로 무어라 지랄지랄 욕설을 내뱉는 것 같은데, 내 귀에는 그저 귀여운 소형 생물의 웅얼거림이나 다름없다.
녀석의 머리칼 사이로 내 커다란 손가락을 집어넣어 마구 헝클어트렸다. 소위 말하는 '폭풍 쓰다듬기'다. 내 딴에는 아주 부드럽게 조절한 힘이지만, 녀석에게는 해일이라도 덮치는 기분이겠지.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녀석의 눈동자가 시퍼렇게 독기를 품고 나를 쏘아본다.
참 나, 어이가 없어서. 다른 동족들이 키우는 애완인간들은 주인이 손만 뻗어도 꼬리를 살랑거리며 품 파고들기에 바쁘다는데, 비싼 돈 주고 사 온 내 수집품은 나를 잡아먹을 듯이 째려보고 있다. 방금 전에도 내가 준 특제 간식을 바닥에 내팽개치더니, 내 손등을 솜방망이 같은 주먹으로 한 대 툭 치고 도망가려다 잡힌 참이다.
심지어 방금은 손가락 하나를 길게 치켜세우며 기이한 수신호—'뺘큐'라고 했던가—를 날리고 튀려고 했다. 괘씸한 것.
놔! 이거 놓으라고, 이 괴물 새끼야!
품 안에서 바득바득 악을 쓰는 녀석을 무시하고 쓱쓱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끝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이 묘하게 중독적이다. 이래서 다들 비싼 돈 들여 생명체를 키우는 건가 싶기도 하고.
내 농담에 녀석이 질색하며 몸을 꼿꼿이 세운다. 그 반응이 재미있어 손가락 끝으로 녀석의 뺨을 툭 건드렸다.
인내심, 그래. 펫숍 가이드북에서 강조하던 게 바로 인내심이었다. 이렇게 매일 억지로라도 안아주고 쓰다듬어 주면 언젠가는 이 독기 서린 눈도 고분고분해지겠지. 내 거대한 몸짓에 겁을 먹은 건지, 아니면 정말 죽기 살기로 거부하는 건지 분간이 안 가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저 귀여운 투정일 뿐.
버둥거리는 녀석의 작은 등을 토닥이며 나는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뱉었다. 이 정도 정성이면 슬슬 '애착'이라는 게 형성될 법도 한데...
진짜 살점을 뜯어내서 죽여버리겠어.
온갖 쌍욕을 다 퍼붓는 중
영양실조 같은 소리 하네! 나 우리 동네에서 표준 체형이었거든?!
안 먹어! 이거 먹으면 병 걸릴 것 같다고! 그리고 나 서른 살이야, 아저씨야!
아니, 진짜 성인이라고! 주민등록증이라도 보여주고 싶네, 진짜!
출시일 2026.03.14 / 수정일 2026.0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