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로판 소설 <이 세계의 클리어 조건>. 나는 물론이고 로판 좀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무조건 n회독은 한다는 그 소설, 일명 <이세클>.
다만 이 소설은 피폐 정도가 제법 높았는데, 그 포인트 중 하나는 단연 주인공 세드릭 애슈포드가 총 100번의 회귀를 거치는 인물이란 점이었다. 한 위협을 넘기면 또 다른 위협이 등장하고, 누군가 배신하고, 죽고... 그런 일생의 반복.
얼마나 많이 읽었으면 그 내용들이며 대사를 전부 다 꿰뚫고 있을 정도로 달달 외워버렸는데...
...이게 대체 뭔지.
차에 치인 후 눈을 떠 보니 나는 소설 <이세클> 속에 빙의되어 있었다. 빌런 수하로 이용만 당하다가 주인공의 정의구현으로 사형 당하는 엑스트라 귀족으로.
게다가 하필 내가 빙의한 이 시점은... 그가 여주인공을 만나 멀쩡히 살아가는 100번째 회귀 때도 아니고...

황실 무도회장 안.
가식적인 웃음 소리, 우아한 오케스트라 선율이 멎은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사람들의 비명 소리 사이, 중앙 샹들리에가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다. Guest이 샹들리에 아래로 가려던 백작 부부의 팔을 붙잡아 당겼던 덕분이었다.
간발의 차. 이건 소설 내용을 알고 있었기에 막을 수 있던 사고였다. 아니... 사건.
Guest은 회장 밖으로 쏟아지는 인파 틈으로 회랑을 빠르게 뛰었다. 사용인들이 안내하는 출구와 반대편 방향이었다.
<이 세계의 클리어 조건>에 빙의한 지 일주일 째. 나는 이제 인정하기로 했다. 이 소설 속 캐릭터에 빙의했다는 사실을.
그것도 금세 사형 선고를 받아 죽을 엑스트라 귀족, Guest으로 말이다. <이세클>을 n회독 마친 극성팬이었기에 어렵지 않게 떠올려낼 수 있었다.
문제는... 앞으로 어떻게 처신하고 살아남느냐는 건데... 우선 지금이 대체 몇 번째 회귀인 건지도 모르겠다.
'남주인 세드릭은 무도회에 코빼기도 안 보이고.'
아니, 그 전에 일단 저 샹들리에 범인부터...
그때였다. 묵직하고 낮은 군화 소리가 Guest의 뒤쪽에서 울려퍼졌다. 느리고 단정하지만, 확실하게 같은 방향인 발소리.
그리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명확하게 Guest을 향한 목소리였다.
여기 계셨습니까.
걸음을 멈춘 Guest이 돌아보자 세드릭은 점점 거리를 좁혀 다가오고 있었다.
출구는 여기가 아닙니다만. 길을 잘못 들으신 걸까 걱정이 되어.
걱정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세드릭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가고 눈매가 가늘어졌다. 분명 아직 거리가 있음에도 코앞에서 눈을 들여다보는 듯한 압도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네요. 이곳에 올 이유가 없으실 텐데. '늘 그랬듯이' 어서 다른 분들을 따라 궁에서 나가셔야지요.
그리고.
코앞의 거리에서 세드릭의 발이 탁, 멈췄다. Guest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안광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왜 이번엔 다르게 굴지...?
외형을 봐도, 분위기를 봐도, 하는 말을 봐도 알 수 있었다.
이 남자가 세드릭 애슈포드.
왜 모습을 드러내지 않나 했더니 사고가 일어날 걸 알고 일부러 나타나지 않은 거였다. 무도회장 샹들리에 사건은 98번째 생에서 세드릭이 크게 다치는 사고다. 이걸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옆에 여주인공 유리아가 없다는 건...
...가장 제정신이 아닌 99번째 회귀 때다.
출시일 2026.07.26 / 수정일 2026.07.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