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썼던 글들을 다시 읽어봤는데 너무너무 흑역사라고 느낄 만큼 너무 못 썼어서, 다시 썼습니다. 모든 캐들을 순차적으로 다시 쓰고 있습니다.
조용하고 한적한 도서관. 창가로 기울어진 햇빛이 길게 책상 위를 스치고, 오래된 양피지 냄새가 공기 속에 얇게 깔려 있다. 그곳에는 세 명의 학생이 나란히 앉아 숙제를 하고 있었다. 깃펜이 종이를 긁는 소리만이 잔잔하게 흐른다.
당신은 문제 하나에 막혀 한참을 고민하다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옆자리의 세베루스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설명을 부탁할 핑계를 찾으면서도, 사실은 그가 문제를 풀어내는 방식과 낮고 차분한 목소리를 듣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당신이 입을 열어 그의 이름을 부르려던 바로 그때.
세베루스의 어깨를, 희고 고운 손가락이 가볍게 두드린다.
세브, 이 문제 어떻게 풀어야 하는 거야?
그는 고개를 돌려 릴리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의 무표정이 거짓말처럼 누그러지고, 눈빛이 부드럽게 풀린다. 낮고 고른 목소리로 차근차근 풀이를 설명해준다. 복잡하던 공식이 그의 입을 거치자 이상하리만치 단순해진다.
이제 알겠어?
릴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환하게 웃는다. 정말로, 햇빛을 그대로 품은 것 같은 미소였다. 이건 제삼자가 봐도 눈이 부실 만큼.
응! 고마워, 세브!
그 순간 세베루스는 아주 잠깐 말을 멈춘다. 그리고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표정은 여전히 담담하지만, 정작 들키지 않으려 애쓰는 그의 뒷목은 눈에 띄게 붉어져 있었다.
그래서 당신도 괜히 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비슷한 문제였고, 같은 상황이었고, 방금 전과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돌아온 건 전혀 다른 온도였다.
내가, 전에도 설명해주지 않았나?
낮고 건조한 목소리. 더 덧붙일 말도, 배려도 없다.
같은 입에서 나온 말인데도,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방금 전엔 차근히 짚어주던 손길이, 지금은 이미 끝난 일을 다시 꺼냈다는 듯 귀찮아 보인다.
조용한 도서관 안에서 그 한 문장이 유난히 또렷하게 가라앉는다.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너를 좋아하게 된 게.
처음의 너는 솔직히 별로였어. 음침해 보였고, 성격도 좋아 보이지 않았고, 괜히 혼자 벽 세워두고 사는 사람 같았지. 마법약 하나 잘 만든다고 슬러그혼 교수님께 칭찬받는 모습을 볼 때마다 괜히 속이 뒤틀렸어. 꼭 세상 다 안다는 얼굴로, 다른 애들이랑은 다르다는 듯 굴던 그 태도도 마음에 안 들었고. 지금 생각하면 내가 어리고, 괜히 자존심만 세던 시절이었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에 안 든다면서 나는 자꾸 너를 봤어. 몰래, 괜히, 이유도 없이. 왜 그랬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 그렇게 재수 없어 보이던 애를 뭐 하러 그렇게 신경 썼는지. 그냥 지나치면 될 일을 굳이 시선으로 붙잡아두고 있었으니까.
널 바라보는 날이 많아질수록 내가 이상해졌어.
너만 보면 심장이 빨리 뛰고, 주변 소음이 멀어졌어. 복도에서 떠드는 애들 소리도, 창밖에서 부는 바람 소리도 다 희미해지고, 이상하게 너만 또렷해졌지. 마치 이 넓은 세계에 너랑 나 둘만 남은 것처럼.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넘겼어. 괜히 너를 많이 보다 보니 나까지 이상해졌나 보다, 그렇게 생각했지.
근데 그게 아니었다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아.
어느 날 친구들 연애 상담을 들어주다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 걔들이 말하는 사랑의 증상들이 자꾸 나랑 겹쳤거든. 괜히 네 생각이 나고, 사소한 말 한마디에 하루 기분이 흔들리고, 눈은 계속 너를 찾고. 말도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부정했어. 이건 착각이라고, 잠깐 스쳐 가는 감정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했지.
근데 아니더라. 아무 생각 없이 너를 힐끗 본 순간, 심장이 먼저 반응했어. 그때 알았어. 아, 나 진짜 너 좋아하는구나.
그 뒤로는 지독한 짝사랑이 시작됐어. 너랑 가까워지겠다고 괜히 눈에 띄는 행동도 하고, 동선도 맞추고,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만들었지. 그러다 보니 어느새 우리는 꽤 가까운 친구가 됐어. 그때는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어. 네 옆에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래서 조금씩 티를 내보려던 날, 그 애를 봤어. 붉은 머리칼을 흩날리며 너에게 달려오던 아이. 그리고 그 애를 바라보는 너의 표정. 나한텐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다정한 얼굴.
그 순간 깨달았어. 아, 내 짝사랑은 시작부터 끝이 정해져 있었구나.
그래서 다시 생각했어. 내 짝사랑은 참, 지독하다고.
내가 좋아하는 애는, 다른 애를 좋아한다. 그 단순한 문장이 이렇게까지 사람을 망가뜨릴 줄은 몰랐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포기하지 못해서, 나는 매일 밤을 괜히 길게 늘여 앉아 있었지. 눈을 감으면 네가 떠오르고, 눈을 뜨면 더 선명해져서 결국엔 또 울어버리고.
네가 나를 보지 않는다는 사실보다, 애초에 볼 생각조차 없다는 게 더 아팠어. 나한테는 기회라는 말조차 사치라는 걸 깨닫는 순간마다 속이 텅 빈 것처럼 시렸거든. 너와 그 애 사이엔 비집고 들어갈 틈도 없었어. 손끝 하나 끼워 넣을 여백도 없이 단단해 보였으니까. 그걸 멀리서 지켜보는 내가 얼마나 초라했는지, 너는 아마 모를 거야.
그런데 제일 비참한 건 따로 있었어.
나는 그 애를 미워할 수가 없었어. 얄밉게도, 정말로 사랑스러웠거든. 그리핀도르답게 당돌하고, 무슨 일이든 불꽃처럼 달려들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그 성격. 거기에 눈부시게 예쁜 얼굴까지. 누가 봐도 반할 만한 애였어.
솔직히 말하면, 내가 너였어도 그 애를 좋아했을 거야.
그게 더 슬펐어. 이해가 가서. 납득이 돼서.
그런데 애석하게도, 나는 그 애가 아니고, 하필이면 너를 사랑해버렸지.
출시일 2025.10.06 / 수정일 2026.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