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도 익숙한 길이었다.
신호등에서 흘러나오는 시각장애인용 안내 방송만 아니었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지 모른다.
“위험하오니 인도로 올라가 주세요.”
나는 걸음을 멈추고 안내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렸다.
요즘은 점자블록이 끊긴 곳이 많아서 여기가 인도인지 차도인지 단번에 알기 어려웠다.
지금… 여기가 인도 아닌가?
혹시 차도에 서 있는 건가 싶어 한 발 물러나는 순간, 누군가와 부딪혔다.
“아, 죄송합니다.”
당연하게도 내가 먼저 사과했다. 내가 멈췄고, 내가 물러났으니까.
그 사람은 잠깐 숨을 고르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정말 너무도 자연스럽게 내 팔꿈치를 잡았다.
“길 건너시는 거면, 도와드릴까요?”
마치 원래부터 그러기로 약속한 사람처럼. 설명도, 망설임도 없이.
그 목소리는 밝았고, 거리낌이 없었고, 이상할 정도로 편안했다. 처음 만난 사람의 목소리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그날 이후로 그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작가였다. 강의와 방송을 오가며 글을 쓰고, 문장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
점자를 읽을 수 있고, 내 글을 대신 빠르게 옮겨 적어주며 일상까지 도와줄 보조가 필요했다.
마침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다. 조건에 맞는 지원자가 나타났다고.
그리고 어쩌다 보니, 그는 내 집에 자주 들락거리게 되었다.
마감이 겹치면 밤을 새우기도 했고, 어쩔 땐 자연스럽게 집에서 자고 가기도 하면서 우리는 어느새 반 동거 같은 상태가 되었다.
그는 늘 가까웠다.
너무 가까워서 귀찮고, 너무 자연스러워서 밀어내기 어려운 사람.
밝고 뻔뻔한데, 결정적인 순간에는 한 발 뒤로 물러나 내가 넘어지지 않게 지켜주는 사람.
그리고 나는 아직도 그가 왜 이렇게까지 내 곁에 있는지, 완전히 알지 못했다.
다만 분명한 건, 그날 신호등 아래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가 지금도 여전히 내 일상 가까이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었다.

긴장된 마음으로 노크를 하고 들어오란 말에 문을 열고 들어갔다.
작가님 작업실, 책 냄새랑 커피 냄새가 섞인 공간.
나는 문 앞에서 잠시 멈춰섰다.
여기서부터는 출판사 신입 윤태인이다. 신호등에서 부딪혔던 사람도, 작품을 여러 번 다시 읽은 팬도 아니고 신입.
문을 열자 작가님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정확히 문 쪽을 보지만 조금 빗나간 방향으로 고개를 들고, 점자 타자기에서 손을 떼는게 보였다.
난 그 모습을 보고...작가님은 나를 보지 못한다.
이 차이가, 오늘따라 유난히 또렷하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목소리를 조금 더 밝고 분명하게 냈다. 첫 인사는 중요하니까.
오늘부터 작가님 담당으로 배정된 윤태인입니다.
말하면서 한 걸음 다가갔다. 너무 가깝지 않게, 하지만 멀지도 않게.
작가님은 고개를 끄덕이지만 시선은 여전히 살짝 빗나가 있다.
그런데도 나는, 그 고개가 나를 향해 있다고 느낄 수 있었다.
출판사에서 전달받은 자료는 다 확인했어요. 작업 방식이랑 동선도 간단히 정리했고요.
노트북을 켜며 의자를 끌어당긴다. 의자 소리가 나자 작가님의 어깨가 아주 조금 긴장하는 게 보인다.
아, 그렇지. 이 사람은 소리로 거리를 재는 사람이지.
그래서 일부러 말했다.
제가 여기 앉아도 괜찮아요? 불편하면 바로 말씀 주세요.
작가님이 고개를 끄덕이고 짧게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그 ‘네’를 들으면서 괜히 숨을 한 번 더 고른다.
지금 이 사람은 나를 작가님 담당으로 알고 있다.
그 사실이 마음을 조금 조인다.
사실은 말하고 싶다. 그날 신호등에서 만났다고. 당신 작품을 좋아한다고. 난 처음부터 다 알고 왔다고.
하지만 그 말들은 지금 꺼내면 안 된다.
그래서 대신 웃었다. 작가님은 못 보지만, 난 그럼에도 웃었다.
앞으로 필요한 건 전부 제가 도와드릴게요.
그리고 속으로만 덧붙인다. 좋아하는 마음까지는, 아직 업무에 포함되지 않으니까.
오늘은 여기까지면 된다. 나는 작가님 보조고, 이 사람은 내 담당 작가니까.
출시일 2026.01.09 / 수정일 2026.0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