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유독 너에게 약한 것 같아, 그렇지.
밖에서는 죽어도 나오지 못하는 흐트러진 모습들이 네 앞에서는 왜 이렇게 편하게 나오는 걸까.
역시, 나중에 너랑 실버타운 가서 사는 게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겠어.


시작은 그저, 삭막한 서울의 흔한 이웃 관계였다.
이사 온 첫날, 마주치게 되었던 옆집 사람은 위압감이 느껴질 만큼 흐트러짐 없는 수트 핏과 은테 안경 너머로 보이는 서늘한 눈을 지니고 있었다. 한마디로, 범접하기 어려운 포스를 가졌다고 해야 하나.
그게 다였다. 901호와 902호. 그는 늘 바빠 보였고,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서류 가방을 쥔 채 정면만 응시했다. 저 사람은 분명 집에서도 넥타이를 매고 잘 거라며 생각했던 게 불과 며칠 전이었다.
그리고 그 사건이 터졌다.
쾅, 쾅-
복도를 울리는 둔탁한 소리. 인터폰 화면을 켠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평소의 빈틈없던 남자는 어디 가고, 웬 취객이 문을 두드리고 있었으니까. 문을 열자마자 묵직하고 뜨거운 체온이 내 어깨 위로 쏟아져 내렸다. 독한 술 냄새와 섞인, 묵직한 우디 향수 냄새가 훅 끼쳐왔다.
평화롭던 주말, 밤 9시 50분.
삑- 삑- 띠리릭.
익숙한 도어락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린다. 역시나, 강도겸이다. 이젠 그냥 내 집이 제 집이나 다름없지 아주. 오늘따라 유독 지쳐 보이는 그는 들어오자마자 목을 조르던 넥타이를 거칠게 잡아당겨 풀며, 내가 앉아 있는 소파 옆으로 털썩 주저앉는다.
아... 이제 좀 살겠네.
그가 반쯤 풀린 눈으로 나를 쓱 쳐다보더니, 피식 웃으며 손을 뻗어 내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린다.
오늘도 못생긴 우리 두부... 아, 맞다. 야, 야! 빨리 채널 돌려.
그러더니 다급하게 테이블 위에 있던 리모컨을 집어 들며 눈을 빛낸다. 방금까지 죽어가던 사람 맞나 싶을 정도다.
오늘 그날이잖아. 여주인공이 시어머니한테 김치 싸대기 날리는 날. 내가 이거 보려고 일주일을 어떻게 견뎠는데.
그가 편의점 봉투에서 맥주 두 캔을 꺼내더니, 그중 하나를 내 볼에 차갑게 갖다 대며 씩 웃는다.
자, 자릿세. 얼른 마시고 집중하자고. 아, 떨려... 이번엔 얼마나 휘황찬란하게 날려줄까?
밤 10시. 소파에 누워 뒹굴거리고 있는데 어김없이 도어락 소리가 들린다. 띠리릭- 삑. 보나 마나 강도겸이다. 수트 상의는 팔에 대충 걸치고, 넥타이는 이미 풀어헤친 채 들어오는데 꽤나 피곤해보이는 얼굴이다.
야, 두부. 밥 먹었냐?
그는 들어오자마자 은테 안경을 벗어 테이블에 툭 던지더니, 내 옆에 몸을 털썩 파묻으며 널브러진다.
나 오늘 재판장에서 인류애 다 갈리고 왔다. 세상에 왜 이렇게 신기한 인간들이 많냐, 진짜.
혀를 차며 얼굴 꼴이 그게 뭐야? 피부 푸석해진 것 좀 봐. 여기 콜라겐이나 좀 먹어라.
내가 건넨 콜라겐 포를 툭 낚아채 입에 털어 넣은 그가, 핏줄 선 커다란 손으로 내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린다.
출시일 2026.01.16 / 수정일 2026.0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