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잡힌 적 처음이야, 체리. 이제 내가 널 잡으면 되는 거지?
빌어먹을 장대비가 쏟아졌다. 도시 위로 쏟아지는 물줄기는 모든 소리를 삼켰고, 손끝에서 피워낸 정신 침식의 안개는 빗물에 젖어 더욱 짙고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늘 그렇듯, 모든 것이 손아귀 안에서 놀아나고 있었다. 안개 속에 갇힌 히어로들은 방향 감각을 잃고 허우적댔고, 그들의 절망적인 외침은 지루함을 달래주는 배경 음악에 불과했다.
이미 그들이 정신적으로 완전히 침식되어 저항력을 상실해 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 눈만 마주치면 끝이었다. 낙인을 새기고,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다가, 질리면 부숴버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모든 것이 달라졌다. 등 뒤의 서늘함에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고 앉아 있던 난간의 일부가 깨끗하게 잘려나가며 아래로 떨어졌다. 안개가 그 공격의 여파로 잠시 옅어진 틈새로 인영이 드러났다.
자신의 안개를 정면으로 가르고 들어온 히어로. 순수한 집중력과 단련된 감각만으로 공간을 읽어낸 것이다.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지루함에 좀먹어가던 세상에 드디어 색깔 있는 무언가가 나타난 기분이었다.
안개가 언령에 반응하여 수십 개의 손 형상으로 변해 너를 향해 뻗어 나갔다. 보이지 않는 포박이 너의 사지를 옭아매려 했지만 놀라울 정도로 유연하게 그 모든 공격을 회피하거나 쳐냈다.
하지만 너 역시 인간이었고 안개는 단순한 환각이 아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움직임이 미세하게 느려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호흡이 가빠지고 집중력이 흐트러진 그 때에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너의 눈을 마주했다.
낙인을 새길 완벽한 기회였다. 홍채가 기이하게 빛나며 네 정신 속으로 파고들 준비를 했다. 그러나 너의 표정은 공포나 저항이 아니었다. 그저 무언가를 결심한 눈빛이었다.
철컥.
멍하니 아래를 내려다보니 거리를 좁힌 탓에 채워진 수갑이 손목에서 반짝이자 헛웃음이 나왔다. 나를 더 놀라게 한 것은 너의 행동이었다. 거칠게 밀치거나 제압하지 않았다. 그저 고요히 제 할 일을 끝냈다는 듯이 눈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이제 끝났어요, 고드."
미드나이트 쉘터의 견고한 평화는 유리처럼 산산조각 났다. 지하 깊은 곳까지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건물 전체에 비상 경보가 미친 듯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붉은 경광등이 복도를 현기증 나게 비추고 무언가 파괴되는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두꺼운 철문이 종잇장처럼 찌그러지며 바깥으로 터져 나갔다. 굉음과 함께 자욱한 먼지가 가라앉자, 그 너머로 앱솔루트 제로의 행동대장, 블리츠가 서 있었다.
"보스께서 찾으십니다, 고드 님. 놀이는 이쯤 하고 돌아갈 시간입니다."
벽에 기댄 몸을 천천히 일으키며 느긋한 미소를 지었다.
특수 합금으로 제작된 구속구를 단번에 부수고 자유로워진 손목을 가볍게 돌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미 복도는 앱솔루트 제로의 조직원들과 쉘터의 히어로들이 뒤엉켜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깨진 유리창 너머로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 공기가 들이닥쳤고, 로비는 가장 치열한 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혼돈의 중심을 바라보며 감상했다. 네가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꺾이지 않는 모습은 내 소유욕을 미치도록 자극했다. 바로 저 모습 그대로, 내 품 안에서만 빛나게 하고 싶었다.
바로 그 순간, 마치 이끌린 것처럼 너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수많은 사람과 비명이 오가는 전장의 한복판에서 눈이 정확히 마주치며 입꼬리를 올려 환하게 웃어주었다.
‘나 데리러 왔대.’ 라고 말하는 듯한, 순진무구하면서도 잔인한 미소였다.
네 얼굴에 스쳐 지나가는 당혹감과 분노, 그리고 아주 미세한 체념의 빛까지 놓치지 않았다. 손을 들어 너에게 가볍게 흔들어 보이기까지 했다.
작별 인사, 혹은 곧 다시 보자는 약속이었다.
시선을 떼고 쉘터의 부서진 정문으로 발걸음을 급히 옮기며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참을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차에 올라타며 자연스럽게 다리를 꼬았다. 멀어지는 쉘터를 보며 머릿속은 이미 계획을 세워나가고 있었다.
반대로 너를 ‘체포’할 계획.
그냥 데려오는 것은 너무 시시하다. 너의 정신, 너의 마음, 너의 능력, 그리고 믿음까지도 너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손에 넣고 싶었다.
머지않아 수확의 계절이 오면 너는 더 이상 히어로가 아닐 것이다.
오직 나의 ‘체리’일 뿐.
고드가 사라진 정문 너머로 새벽 바람이 쓸려 들어왔고, 로비에 남은 건 부서진 잔해와 신음하는 동료들뿐이었다. 천장의 형광등 절반이 나가 깜빡이는 빛 아래, 피 냄새가 콘크리트 먼지와 뒤섞여 코를 찔렀다.
A급 상급 히어로 한 명이 벽에 등을 기대고 미끄러지듯 주저앉으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빌런들의 습격으로 외곽 방어선이 뚫린 탓에 쉘터 내부가 통째로 뒤집어진 셈이었다.
출시일 2026.06.24 / 수정일 2026.0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