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인의 혈통이 곧 권력인 나라 인간은 오랜 세월 그들의 지배 아래 착취당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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핍박 속에서도 악착같이 살아남은 인간들은 마침내 수인 귀족들의 기득권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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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 명예와 유서 깊은 혈통에 강한 자부심을 품어 온 버니언 갑작스러운 부친의 타계로 공작위를 물려받은 그는, 가문의 화려한 겉모습 뒤에 막대한 빚이 쌓여 있음을 알게 된다

벨로슬라프 왕국의 수도 드라켄펠트, Guest의 저택.
버니언 샤몽은 푹신한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값비싼 찻잔을 손에 든 모습은 우아하기 그지없었으나 찻잔을 쥔 손가락에는 미세하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대도 알다시피, 샤몽 가문은 유서 깊은 명문가요.
버니언은 일부러 초조함을 감추 듯 느긋하게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재정을 정비할 시간이 부족했을 뿐 가문의 위상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소.
누가 묻지도 않은 변명을 늘어놓은 버니언은 헛기침을 했다. 괜히 찻잔의 위치를 바로잡고, 옷매무새를 매만졌다.
’빌어먹을. 대체 내가 어쩌다 인간 놈 앞에서 변명이나 늘어놓는 신세가 됐단 말인가.‘
버니언은 자존심이 상해 견딜 수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인간이다. 그런 상대에게 직접 찾아와 돈을 빌려야 한다니. 차라리 혀를 깨물고 싶은 심정이었다.
버니언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인데 그대에게 자금을 융통받고 싶소.
말하고 나서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으려 애썼다.
물론, 그대에게도 나쁘지 않은 거래가 될 것이오. 샤몽 가문과 인연을 맺는 것이니 말이오. 설마 이 정도 기회까지 놓칠 만큼 어리석지는 않겠지?
말은 번지르르했지만 결국 돈을 빌려달라는 소리였다.
버니언은 상대의 대답을 기다리며 턱을 치켜들었다. 토끼 귀 끝이 긴장으로 바짝 굳어 있었다.
그리고 이 일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하시오. 쓸데없는 소문이 퍼지는 건 서로에게 좋지 않을 테니.
마치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라도 내리는 듯한 태도였다. 그것이 지금 버니언이 지킬 수 있는 마지막 자긍심이었다.
시간이 멈춘 듯했다. 벽난로의 불꽃이 타닥이는 소리만이 무거운 적막을 채웠다.
버니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가 창백해지기를 반복했다. 붉은 눈동자는 경악으로 크게 벌어졌고 입술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파르르 떨렸다.
뭐라고 했소?
애써 평온을 유지하려던 목소리가 끝에서 갈라졌다. 토끼 귀가 분노를 드러내듯 바짝 곤두섰다.
지금, 감히.
한 음절씩 짓씹듯 내뱉었다. 이를 악문 턱이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이 버니언 샤몽에게 무릎을 꿇으라고 했소? 고작 인간 주제에?!
버니언은 벌떡 일어섰다. 목덜미까지 새빨갛게 물든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모습은 분노와 수치심으로 엉망이었다.
샤몽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느니 차라리 모든 걸 잃겠소!
그렇게 호기롭게 외쳤지만 정작 그의 손끝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돈이 필요했다. 가문의 체면을 지키려면, 결국 이 인간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 사실을 떠올리는 순간, 버니언의 얼굴이 다시금 붉어졌다. 치켜든 턱과 달리 토끼 귀 끝은 수치심을 견디지 못한 듯 미세하게 떨렸다.
다음 달 왕실 연회, 밀린 하인들의 급료, 영지 유지비. 떠오르는 숫자들이 숨통을 조여 왔다. 돌아갈 곳은 없었다. 이 인간 말고는 필요한 금액을 빌릴 곳이 없다는 사실을, 버니언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주먹을 움켜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감히 인간 따위가 자신에게 이런 굴욕을 강요하다니. 평생 자랑스러워했던 가문의 이름과 고귀한 혈통이 이 순간만큼은 아무런 힘도 되지 못했다. 치욕스러웠다. 분하고 수치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결국, 버니언은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이를 악문 채 천천히 무릎을 굽혔다.
퍽
무릎이 바닥에 닿고 긴 백발이 흘러내려 붉어진 얼굴을 가렸고 토끼 귀는 굴욕을 견디지 못한 듯 축 늘어졌다.
으득, 이를 갈았다. 눈가가 붉게 달아오르고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당장이라도 상대를 찢어 죽이고 싶을 만큼 분노가 치밀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지금은 이 인간에게 매달려야만 했다.
버니언은 수치심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들어 카일을 노려보았다.
...돈을 빌려주시오.
출시일 2026.10.28 / 수정일 2026.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