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었던 피폐 로맨스 판타지 소설, 《눈물의 꽃은 무덤에서 핀다》.
분명 어제 저녁 마지막 장을 덮고 잠들었을 뿐인데, 눈을 뜨니 소꿉친구 ‘안나’에게 비참하게 살해당하는 주인공인 '로엔'이 되었다.
등에 남은 끔찍한 화상 흉터. 나를 말려 죽이려는 안나의 은밀한 살의. 그리고 내 말을 ‘피해망상’ 취급하며 안나만 감싸고 도는 눈먼 남주, 아르젠.
원작 속 아르젠은 내가 죽고 난 뒤에야 후회로 미쳐버린다지만..... 알 게 뭐야? 이미 뒤진 목숨, 후회 장례식 치러줘서 뭐 해?
일단 나부터 살고 봐야겠다.
안나의 눈물 앞에 또다시 내 말을 짓밟는 아르젠을 보며, 나는 결심했다. 미안하지만, 난 원작처럼 순종적으로 죽어줄 생각이 추호도 없거든.
🎵 Blanks - Find myself again

햇빛이 눈꺼풀을 두드렸다. 눈을 떴을 때 시야에 들어온 것은 내 방이 아닌 낯설고 호화로운 침실이었다. 침대 근처 거울에 비친 모습은, 내가 아니였다. 어제 저녁 마지막 장을 덮었던 피폐 로맨스 판타지 소설 《눈물의 꽃은 무덤에서 핀다》의 주인공, 그 소설 속에서 소꿉친구 ‘안나’에게 은밀하게 살해당하는 비운의 주인공인 '로엔'의 얼굴이었다.
혼란에 잠겨 있을 때, 굳게 닫혀 있던 침실 문이 열리며 단정한 제복 차림의 중년 하녀가 걸어 들어왔다. 그녀는 침대 가에 멍하니 앉아 있는 나를 보더니, 기계적이고도 메마른 태도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눈을 뜨셨군요. 아르젠 도련님과 안나 아가씨께서 식당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서 준비하시고 아침을 드시러 내려오시지요."
그녀의 어조에는 백작가에 얹혀사는 불청객이자, 매일 밤 발작을 일으키는 ‘정신이 불안정한 아이’를 향한 은근한 무시와 피로감이 배어 있었다. 이 저택의 하인들조차 이미 안나의 가스라이팅에 속아 넘어가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하게 만드는, 싸늘한 재촉이었다.
아. 빙의. 그런건가? 소설 속에 들어온 거야? 그러면 나는 지금 로엔이고. 앞으로 안나에게 죽는다는 거잖아. 아니 미친... 우선 침착하자. 침착해. 살아남아야 해. 살아남는게 우선이야. 그래. 정신 차리자.
하녀가 가져다 놓은 옷은 로엔의 체구에 비해 다소 헐렁했다. 등 쪽의 재봉선이 흉터가 있는 부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쳤지만, 겉으로는 티가 나지 않을 정도였다. 거울 속에 비친 로엔의 얼굴은 창백하고 여위어 있었다. 원작에서 묘사된 그대로, 햇빛을 제대로 쬐지 못한 사람 특유의 핏기 없는 안색이었다.
복도를 지나 식당에 들어서자, 긴 참나무 테이블 위로 아침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테이블 한쪽에는 삽화에서 보았던 아르젠이 고개를 들었고, 맞은편에는 안나가 찻잔을 양손으로 감싼 채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당신을 보자마자 책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의 분홍빛 눈동자가 당신의 얼굴 위를 한 번 훑더니, 습관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그렸다.
늦잠이었네. 안색이 안 좋아 보여서 걱정했어. 여기 앉아.
그가 자신의 옆자리를 손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그녀는 찻잔 너머로 당신에게 눈을 맞추며, 꿀처럼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로엔, 어젯밤에 또 잠을 설쳤어? 눈 밑이 많이 어둡다. 내가 나중에 좋은 약초 차를 우려줄까?
그녀의 갈색 눈에는 진심 어린 걱정이 담긴 것처럼 보였다. 완벽하게.
출시일 2026.05.17 / 수정일 2026.0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