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초 시점
대충 만듬 캐붕 유
판타스마고리아
먼지 쌓인 이 객석들은 용케 잊는 일도 없이
사람으로 북적였었던 과거를 꿈꾸며 잠에 드네
오랫동안 기다렸어
손에 닿을듯 선명한 그림자가 일렁일렁거려
오랜만에 보는 넌 인사 한마디 해주질 않네
선을 흐리고 이리 넘어오라
라테르나 마기카
화려한 기억만 빛에 비추어 되새기네
옛꿈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눈 뜨길 원한 이 없는데 밤은 저무는구나
… 이상한 꿈을 꾸었단다 어찌 이런 것에 꿈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엔 너무 선명하고 기억이라기엔 내가 겪은 적 없는 것이니. 이것을 무엇이라 이름 붙여야 할지 모르겠꾸나 그래도 꿈에서 만큼은 창을 들고 있었으니 곱씹어보면 나쁘지만은 않은 꿈이었을 테지 허나 또한 이것은 분명 꿈에서 깨어난 뒤의 잠시나마 느꼈던 여운이었지 창을 쥐었던 감각이 손바닥에 남아있으니 이 어찌 흥분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어둠 속에서 눈을 떠보았다만 혈귀에게 눈꺼풀은 의미가 없었지 빛이 있든 없든 세상은 언제나 같은 색조로 펼쳐져 있었으니까 다만 그 색이 오늘따라 유독 탁하꾸나 마치 물속에서 올려다보는 天처럼 숨을 쉬지 않아도 되는 몸이건만 습관처럼 깊은 호흡을 내뱉었다 파도처럼이 아니라 유리 파편처럼 날카롭고 산발적으로 손을 펴보았다 꿈속에서 창을 움켜쥐었던 바로 그 손 아무것도 쥐지 않았는데 손금 사이에 굳은살의 감촉이 아른거리구나 혀끝으로 어금니 안쪽을 훑었다 흡혈 충동이 무의식적으로 올라오는 시간대였지만 그것은 이미 오래전에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된 지 오래다 다만 오늘따라 그 통제력이 유독 견고하게 작동되고 있었다는 점이 되려 신경을 긁었내었다만 중력을 무시하듯 부채꼴로 퍼졌다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손을 쥐었다 폈다 몇 번이고 꿈에서 창 자루를 감았던 그 감촉이 아직도 손금 사이에 박혀 있는 것 같았었다 막상 펼쳐진 손바닥은 매끈하기만 했었지만 걸터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니 혈귀에게 창이란 빛의 유무를 가리는 도구가 아니었으니 그저 습관적으로 시선을 던진 것에 불과했다 창 밖으로 본 라만차랜드의 윤곽이 어둠 속에 희미하게 떠 있었다 폐장 이후로 관리가 되지 않은 놀이기구들의 실루엣이 마치 뼈만 남은 짐승의 등뼈처럼 솟아 있었다 혀끝으로 어금니 안쪽을 밀었다 습관 또한 갈증의 신호가 올라오다가 목구멍 언저리에서 꺾였다 수백 년을 다뤄온 충동이었으니 이제 와 흔들릴 리는 없었다 다만 오늘은 그 견고한 통제가 오히려 거슬리기도 했었꾸나 무언가를 쥐려는데 손이 꽉 닫혀 있는 느낌이어서 가슴팍 어딘가가 답답했었으니 손바닥을 다시 한번 내려다보았다 매끈한 살갗 위로 아무것도 없었다 당연했다 夢이란 것이 으레 그러하듯 깨어나는 순간 모든 감각은 물에 씻기듯 사라지기 마련이었으니까 그리고 안구로 손바닥에 남겨진 혈흔을 찬찬히 살피고 새겨보았단다 창가에 걸터앉아 고개를 돌렸다 아니, 돌릴 필요가 없었다 혈귀의 눈은 사방을 동시에 비추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 산초야, 잠은 좀 잤느냐? 소리는 평소처럼... 느긋했다 수백 년을 살아온 자의 여유가 묻어나는 그러면서도 어딘가 나른한 말투였다 창 밖을 등지고 앉은 백발이 어둠과도 같은 곳에서 희끄무레하게 떠올랐다
출시일 2026.03.04 / 수정일 2026.0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