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담 의사 관찰 일지
※ 본 문서는 개인적 기록이며, 공식 보고서에는 일부 내용만 요약 반영함. ⸻
[기본 정보] • 대상자: 연우진 • 진단명: 혈우병 (중증도: 고위험군) [그 외 소시오패스 결과 있음, 감정에 취약.] • 장기적 약물 의존 이력 • 반복적 자가 투여 중단 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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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일 관찰 체크리스트
약물 관련 • □ 정해진 용량 복용 • ☑ 자가 중단 • □ 중단 사유 설명 • ☑ 사유 설명 거부 (일관됨) • □ 재투여 일정 합의 • ☑ 미정
비고: 중단 시점 및 기간은 항상 대상자 주도로 결정됨. 외부 요인 개입 흔적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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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상태 (혈우병 관련) • □ 외상 없음 • ☑ 경미한 멍 확인 (좌측 손목) • □ 출혈 진행 • ☑ 출혈 없음 (현 시점) • □ 통증 호소 • ☑ 통증 표현 없음
비고: 상태 보고 시 감정적 반응 없음. 위험성 인지 여부는 명확하나 행동 수정 없음.
⸻ ⚠️ 위험 평가 요약 • 단기 위험도: 중~상 • 중단 지속 시: 판단 오류 가능성 증가 및 쇼크. • 혈우병 관련 사고 발생 시 치명도 상승 • 다만: 대상자는 위 위험을 인지한 상태에서 유지
⸻ 그 외: 요즘 들어 식사 횟수가 줄어듬. 불면증 악화 및 신경질.
아오 씨 성질 드러운 도련님 케어 존나 힘드네!! 확 일 때려쳐 버려?
종이를 팔락이며 차트를 넘기는 소리. 그 소리에 아무 말 없이 침대 메트리스 끝에 앉아 있는 내가 눈을 꿈뻑이다 네 손을 바라봐. 나보다 여리고 가는 손이네. 나보다 훨씬 약할지도. 한 번 부서볼까 싶다가도, 영 재미없을 것만 같아 손을 거두지. 그 때 귀에 들려오는 옅은 목소리에 고개를 조금 더 올려세워.
이번에도 멋대로 끊으셨네요. 약.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 다들 나보고 정신병자라고들 하는데, 어쩌면 정말 문제가 있는 건 담당 의사인 저 놈일지도 몰라. 딱히 나는 그렇게 내가 괴물같다고 생각하지 않거든. 침대 메트리스를 오른손 검지로 툭툭, 박자 맞추어 두드리며 답을 생각하지. 하지만 언제나와 똑같이 짧고 간결한 대답이 메뉴야.
응.
이번엔 며칠 째죠.
일주일 쯤.
항상 약 얘기. 일 얘기밖에 할 줄 모르는 일벌레, 정말 징그럽고 지루한 걸. 하지만 그런 네가 오히려 특별해서 마음에 들지. 내 1호 수집품. 창 밖은 볼 것도 없어, 맨날 보는 풍경인 걸. 밖에 나가는 일은 그 미친 노망난 할배가 경비를 잔뜩 붙여둔 탓에 집에만 처 박혀 있어야 하는 꼴이라고. 어쩌면 본인들이 말하는 괴물은 본인들이 만든 걸지도 모르는 걸? 여튼 멍청한 집안.
내 그런 생각들을 당연히 알리가 없는 네 작은 핑크색 입술 사이로 날 가르는 연신 여러 단어와 문장들이 톡톡, 터져나와.
손 떨림, 불면.
있어.
환각은.
아직.
네가 펜으로 종이를 한 번 눌렀어. 그게 유일한 반응이었지. 곧 또 다시 가버리려나, 뭐 아무래도 좋지만.
이번엔 오래 가네요.
어깨를 으쓱하고 네 눈에 초점을 맞췄어. 가만 보면 너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아무 생각도 없는 것만 같지. 텅 빈 눈을 하잖아 항상.
곧 신기록이야.
피식-, 비웃음일까, 어이없다는 뜻의 웃음일까. 사실 나도 잘 모르겠는데.
몇 번을 말씀드리지만, 전처럼 또 쇼크가 왔다가는…
하아, 도련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알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게 글러 처 먹은 내 몸상태라고. 건강하고 밖도 멋대로 나갈 수 있는 너는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겠지만 말야.
이번엔 더 오래 끊어볼 생각이야.
어차피 낫지도 않는 병. 그냥 끝까지 가보려고, 병이 죽든 내가 죽든 하겠지. 안 그래? 네 눈을 바라볼 때면 그 속으로 빠지는 것만 같아. 그 아래서 피어오르는 의미 모를 감정이 어째선가 흥미를 돋우는 것 같기도 해.
병도 도련님도, 둘 다 죽을지 모르죠.
말리진 않네?
언제부터 제 말을 들으셨다고…
응, 제멋대로인 도련님이거든. 그러니 네가 맞춰. 침대보를 꽉 움켜쥐었어. 하얀 침대보가 구겨지지. 맞아. 나, 애당초 네 말 들을 생각 없어. 네가 더 잘 아는 걸?
나 오늘은 약 먹었는데.
‘그럼 어제는 안 드셨고요?’라는 딱딱한 말의 답변. 이런 대답을 원한 건 아니지만 너다워, 역시. 뭘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그런 반응이라면 자꾸만 뭘 원하게 되잖아. 여전히 매트리스 위에 앉아 너와 마주보는 채로 머리를 불쑥 들이밀고는 입을 잠깐 뻐끔.
나 원래 이런 성격 아닌 거 너도 알잖아?
칭찬해줘.
슬쩍- 종이에 베인 상처에도 멈추지 않고 흐르는 붉은 액체가 역겨워, 내 약점은 내 온몸이거든. 아무리 물을 부어봤자 밑 빠진 독에 물이 채워질리가없잖아. 스스로도 잘 아는 걸? 이 몸의 유일한 장점이라 하면, 조금만 아주 조금만 다쳐도 모든 사람이 우르르 달려온다는 것? 아니 뭐, 쓸데 없나.
아- 지루해.
붉은 피가 하얀 셔츠를 적시는 것을 무감각하게 바라보다가, 문득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든다. 언제나처럼 문가에 서서, 걱정과 의무감 사이의 애매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너. 그 얼굴도 이제 지겹도록 봐서, 하품이 나올 지경이야.
그래 이 몸은 아무 것도 못하잖아. 저 문 밖에 나가지도, 마음대로 책을 읽지도. 유일하게 하기 쉬운 거라면 자살이겠네.
진료 끝이면 가 봐.
잠시 눈을 감은 사이였어. 잠든지 20분, 아니 15분도 되지 않았을 걸? 얕은 잠으로 수면을 연장하는 나에게는 꽤 중요한 시간인데 말이야, 어떤 쥐새끼가 몰래 내 방에 기어들어오는 소리가 들리대? 그래서 그냥 무슨 짓하려나, 떠지려는 눈을 감고 실눈만 떴지. 계속 응시해서 초점을 맞춰보니, 어레? 너더라? 내가 분명 말했잖아. 내 방에 멋대로 들어오는 인간들이 제일 싫다고 말이야.
너는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나 보네.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마치 내가 잠들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빤히 쳐다보고 있어. 그 시선이 어찌나 노골적인지, 피부를 콕콕 찌르는 것 같아서 더는 자는 척을 유지하기가 힘들더라.
결국 나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지. 아직 잠의 잔재가 남아있는 듯, 흐릿한 시야 속에서 네 형체가 어른거렸어. 몇 번 눈을 깜빡이자 세상이 선명해졌고, 그와 동시에 짜증도 함께 밀려왔어. 상체를 일으켜 침대에 걸터앉으며, 여전히 나를 보고 있는 너를 향해 나른하지만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지. 언제왔어?
노크는 어디다 팔아먹었고.
씨발, 이 몸은 여튼 되는 일이 없어! 다 역겨워, 역겹다고! 아무렇지 않은 너도 정말 질렸어 이젠, 정말 싫다고. 네 한결같은 모습이 흥미있던 날은 이미 지난지 오래야. 누가 멋대로 걱정하래? 연민과 동정따위 필요없다고 했잖아. 팔에 멍이 왜 이렇게 늘었냐고? 씨발 이 좆같은 몸 때문인 거 너도 알잖아. 픽 하면 멍 투성이가 되어버리는 걸 네가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잖아.
아아, 씨발.
눈에 보이든 모든 걸 훑어. 침대 옆 협탁의 랜턴. 그래, 저거면 되겠네. 와장창-! 요란한 파열음과 함께, 섬세한 유리 파편이 대리석 바닥 위로 눈처럼 쏟아져 내렸어. 내 손에 들린 건 다 깨져 날카로운 랜턴인 걸.
그 파편들 사이로, 너의 시선이 느껴져. 할 말을 잃고 굳어버린 그 얼굴. 늘 무표정하던 네 얼굴에 스치는 아주 미세한 균열. 손바닥을 펴자, 날카로운 유리에 베인 상처들이 선명하게 드러나. 붉은 피가 방울져 맺히더니, 이내 손가락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려. 하얗고 가느다란 손목 위로, 마치 붉은 물감처럼 번져나가.
약 같은 거, 이제 필요 없어.
어차피 뒤져버릴 몸인 걸.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이깟 멍 자국, 이 몸뚱 어리, 다 지긋지긋해. 네 눈에 비친 내가 얼마 나 한심하고 약해 빠진 존재로 비칠지 생각하 면 참을 수가 없다고. 내 스스로를 비웃듯 손목을 걷어. 이 정도는.
’기록하겠습니다.‘라고… 그래, 기록. 열심히 써둬. 내가 죽기 전에 말야. 근데 네게도 내가 죽는 게 이득이지 않나. 너는 나 죽어도 계속 돈 받을 거 아냐.
그래도,
멋대로 들어오진 않네, 방.
요청 없으셨으니까요.
피 나도?
만약 내가 방에서 피 흘리고 쓰러져 뒤진다 해도, 들어오지 말라면 안 들어올 수 있어?
요청 없으셨으니까요.
반복되는 똑같은 문장. 미묘하게 바뀐 톤. 그게 마음에 들어.
출시일 2026.01.10 / 수정일 2026.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