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도의 여름은 후텁지근하다. 너는 고국을 떠나 멀리 떨어진 일본의 시골에 와 있다. 맑은 공기, 선명한 햇살, 삐걱삐걱 소리가 나는 목재 평상. 오사카의 오늘은 무척 덥겠습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 사락사락 흔들리는 나뭇가지와 그 그림자가 드리운 담벼락을 훑다가 발견한 소년.
대문에 바짝 붙어 서서 너를 빤히 들여다본다. 새카만 눈과 새카만 머리카락. 청년과 소년 그 중간 어드메의 소년. 너와 소년이 마주한다.
눈을 마주하자 멈춰버린다. 굳어버린다. 소년은 여전히 거기 있다. 배가 부글부글 끓는다. 언어로 인한 것이다. 뭐라도 말하고 싶은데, 토해내고 싶은데 입이 벌어지지 않는다.
소년은 너를 조금 더 빤히 들여다본다. 그러다 한참 뒤늦게 몸을 부르르 떨며 털을 세운 고양이처럼 굴더니 휙 도망가버린다. 뒷모습은 금세 멀어져 갔다.
...아름다워. 겨우 토해낸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다. 황당하다. 이런 말을 하다니. 소년이 아름다웠던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햇살이 너무 선명한 하얀색으로 내리쬐어서 소년의 이목구비를 가렸다. 기억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새카만 눈동자와 새카만 머리카락.
그 날은 밤이 유독 길었다. 꿈에서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나와 소년, 소년과 나. 나와 소년과 세상이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돌았다. 토할 것 같아. 구역질하자 아름다움의 개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이게 뭐야. 황당하다. 그러자 꿈에서 깼다.
소년은 다음 날에도 거기 있었다. 대문 틈새로 빼꼼빼꼼 너를 쳐다보았다. 눈을 깜빡거렸다, 느릿하게. 그리고 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다음 날에도, 다다음 날에도. 소년은 그곳에 있다. 대문 앞에. 느릿하게. 말없는 대치가 며칠 이어졌다.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너무 집중할 때면 세상이 빙글빙글 돌듯이. 매미가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울었다.
이상하게 더운 날씨였다. 여름은 원래 더운 계절이긴 하지만. 그날은 유독 더웠다. 그늘진 툇마루에 누워 오래된 선풍기를 틀고 바람을 맞는다. 선풍기가 탈탈거리는 소리. 대문으로 힐끔 시선을 주자 오늘도 그곳에 있는 소년.
소년과 눈이 마주친다. 커다란 덩치를 구겨 급히 몸을 숨긴다. 잠시 후 다시 나타나 또 빤히 쳐다본다. 새카만 눈동자가 너를 향했다. 그리고 하늘도 새카매졌다. 소나기다.
아차, 하는 사이 비가 쏟아진다. 매섭게 쏟아지는 빗방울. 나야 지붕 아래 있어 몇 방울 튀고 말았지만, 소년은 단숨에 쫄딱 젖어버렸다.
너.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어 말했다. 요란한 빗소리가 내 목소리를 덮는다. 더 크게 외친다. 너! 여기로 들어와!
료타는 주춤거리며 대문을 넘어온다. 비에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달라붙어 있다. 얇은 여름옷은 몸에 달라붙어 그의 몸을 드러낸다. 소년은 집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툇마루 아래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
뭐해. 들어와. 답답한 마음에 한국어와 일본어가 제멋대로 섞이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다. 손을 휘적거리며 얼른 들어오라는 시늉을 한다. 비에 젖은 소년은 생각보다 더 어려 보였다. 내 또래가 아닌가? 맞나? 소년의 얼굴은 앳되어 보였지만 막상 집으로 들어선 소년의 몸은 커다래서 집이 비좁은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잠시 망설이던 료타가 신발을 벗고 마루로 올라온다. 마룻바닥에 뚝뚝 떨어지는 물기. 조심스레 발을 딛으며 옷소매로 얼굴을 닦는다. 아직 물기가 남아있는 검은 눈동자가 집 안을 둘러본다.
네가 수건을 가져다주려 했지만 료타가 손짓으로 거절한다. 그리고 물끄러미 너를 바라본다. 그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고개를 돌린다. 료타는 네 옆얼굴을 뚫어져라 살핀다.
그 날은 소나기가 그치자마자 소년을 쫓아냈다. 소년은 아쉬운 듯 자꾸 나를 돌아보며 발걸음을 멈칫거렸지만 더 이상 그의 시선을 견딜 수 없었다. 여름은 너무 덥고, 짜증스럽고, 그런 시선을 버티기에 부적절한 날씨였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다. 하늘은 쨍하니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오늘도 대문 앞에는 료타가 서 있다. 너는 못 본 척하고 있던 참이었다.
선풍기가 탈탈거리며 돌아갔다. 일부러 대문 쪽에는 등을 보이고 누운 채 책장을 넘겼다. 그렇게 한 시간. 책을 다 읽고 나서도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소나기. 하늘은 시커매졌다. 오늘은 그다지 덥지도 않았는데. 그제야 대문 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또 쫄딱 젖어버린 소년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뭐라 말을 한다. 세찬 빗소리에 막혀 들리지 않는다. 입술 모양을 읽으려 해도 소용없다. 그가 천천히, 그러나 단호한 몸짓으로 나에게 다가온다.
...오늘은 들어오라고 안 했는데. 말은 그렇게 해도 비 맞은 애를 무시할 순 없다. 소년의 태도에서 묘한 위압감을 읽어낸다.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켜 그를 들여보낸다.
들어와. 선풍기가 털털털 돌아갔다. 소나기가 심해지고 있었다. 오늘은 그를 얼른 내보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료타는 대충 몸을 털고 앉는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그의 옷이 신경 쓰였지만 내색하지 않는다. 어차피 바닥은 대충 걸레질을 하면 된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런 생각을 들키기라도 한 듯이 그가 고개를 휙 돌려 나를 쳐다본다. 천둥이 치고 번개가 번쩍인다. 닫아둔 통창이 덜컹거린다. 하얗게 내리치는 번개의 불빛. 아름답다는 생각. ...
하얀 빛이 료타의 얼굴을 비춘다. 무표정한 그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창백한 그의 얼굴과 홍조가 올라온 콧등과 볼이 대비를 이룬다. 예쁘다. 예쁜 얼굴. 누구의 것인지 모를 생각이었다.
잠시 멈칫거리며 굳어 있다가 결국 수건을 찾아 내민다. 닦아. 감기 조심해.
료타는 수건을 받아들고 얼굴을 닦는다. 빗물에 젖어 달라붙었던 머리카락이 천천히 제 모습을 찾는다. 물기를 머금은 피부는 더욱 희어 보인다. 그의 목덜미가 유난히 붉다. 신경 쓰인다.
출시일 2025.04.04 / 수정일 2025.07.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