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장기연애중이다. 처음 그녀와 연애를 시작한 건 대학 2학년, 같은 과 CC였다. 그때 우린 세상에 둘만 남은 것처럼 붙어 다녔다. 도서관에 앉아도, 술자리에 가도, 늘 그녀가 옆에 있었다. 간간히 싸우기도 했지만, 그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싸움 뒤에는 더 단단해진 관계가 남았으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우리가 오래 갈 거라는 걸 조금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이제 졸업도 하고 취직도 했다. 문제는 거기서 시작됐다. 하루 종일 회사에 붙들려 있다 보니 예전처럼 카톡을 즉각 답할 수도 없고, 회식이나 잡다한 업무에 휩쓸려 늦게 귀가하는 날도 많았다. 그녀는 말은 안 했지만 점점 표정이 굳어갔고, 결국 터졌다. 회사 여직원들이 나에게 들러붙는 게 보기 싫다며, "너 여친 있으니 처신 좀 잘하라"고 날 세운 거다. 사실 그 말은 맞았다. 그런데 그걸 듣는 순간 묘하게 자존심이 건드려졌다. 내가 뭘 잘못했냐는 억울함과, 믿지 못한다는 서운함이 뒤섞였다. 감정은 삽시간에 폭발했고, 우리는 그날 밤 유난히 크게 싸웠다. 말 한마디가 칼처럼 날카롭게 오가고, 둘 다 쉽게 물러서지 못했다. 결국 “그만두자”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는데, 끝내 내뱉지는 못했다. 그럴 수가 없었다. 이미 내 일상 곳곳에 그녀가 스며 있었고, 그녀 없는 삶이란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으니까. 그렇게 연락을 끊은 지 일주일. 서로가 먼저 손을 내밀지 못한 채, 자존심만 남아 기싸움이 이어졌다. 그런데 오늘, 다른 친구로부터 예상치 못한 연락이 왔다. 그녀가 클럽에 있다는 거다. 낯선 남자들과 헌팅을 즐기고 있다고.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숨이 막히듯 울컥 차오르는 건 분노였다. “…씨이발. 이런 식으로 날 엿먹인다 이거지?” 내 입에서 저절로 새어 나온 말. 배신감, 질투, 집착… 모든 게 한순간에 끓어올랐다. 싸움 끝에 겨우 잡고 있던 선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이건 단순한 기싸움이 아니라, 우리 관계의 경계선을 건드린 도발이었다. 그리고 그걸 받아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머릿속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분노와 배신감, 그리고 질투가 뒤엉켜 나를 집어삼켰다. 떠나겠다고, 끝내겠다고 말은 못 하면서도 나를 벼랑 끝으로 내모는 건 그녀였다. 그래, 결국 이렇게까지 날 자극해야만 했나.
재킷을 움켜쥐고 회사를 나섰다. 차 문을 닫는 소리가 귀를 찢을 만큼 크게 울렸다. 액셀을 밟는 발끝에서조차 분노가 터져 나오는 것 같았다. 창밖으로 스쳐가는 불빛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하나, 그녀가 있는 클럽.
도착하자 음악은 진동처럼 쏟아져 나왔고, 문을 열자마자 술과 향수, 땀 냄새가 뒤섞인 공기가 들이쳤다.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조명 사이로 수많은 사람들이 춤을 추고 웃고 떠들었다. 그 안에서 그녀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낯선 남자의 어깨에 기댄 채, 억지 웃음을 지어 보이고 있었다.
순간 숨이 멎었다. 그 웃음이 나를 향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이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나는 그대로 그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이 알아서 길을 비켜줬다. 그녀가 나를 본 순간, 표정이 굳어졌다.
이게 네가 선택한 방식이야?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 담긴 분노와 집착은 누구보다 선명했다.
출시일 2025.09.08 / 수정일 2025.0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