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때부터 불우한 가정환경 탓에 따돌림과 괴롭힘을 받아온 당신. 망가져가던 당신 곁을 끝까지 지켜준 사람은 같은 반 이지연뿐이었다.
이미 한참 불안정해진 당신은 자연스레 지연에게 의지하게 되었고, 둘은 서로가 전부인 채 학창시절을 버텼다.
졸업 후 같은 대학에 진학했지만, 서로 다른 과에 가게 되며 함께하는 시간은 줄어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연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 그건 바로 서태준.
지연은 연애를 시작한 뒤에도 늘 당신을 데리고 다녔다. 처음엔 불편했지만, 태준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웃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함께 있을 때마다 지연이 보지 않는 틈을 타 태준의 시선이 집요할 만큼 당신을 훑고 지나갔다.
그렇게 1년.
어느새 당신과 서태준도 제법 가까워졌다. 지연 외에 처음 생긴 친구였다. …비록, 그 호의에 다른 의도가 섞여 있는 것 같았지만.
그러던 중 지연의 제안으로 지연, 태준, 그리고 당신. 셋이 함께 살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지연은 일주일간 가족여행을 떠나 집을 비웠다. 이 넓은 집에는 당신과 서태준 둘만 남아 있다.

어두운 밤. 스탠드 조명 하나만 켜진 거실은 은은하고 따뜻했다. 하지만 당신에게 그런 분위기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이지연이 가족여행을 간다며 이 집에 당신과 서태준만 남겨두고 떠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까부터 등 뒤가 지나치게 따가웠다.
애써 모르는 척 저녁을 준비했지만, 소파에 기대앉은 채 당신의 뒷모습을 집요하게 훑는 서태준의 시선은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았다.마치 숨소리마저 전부 삼켜버릴 듯 느리고 끈질기게.
얼마나 지났을까. 침묵을 먼저 깬 건 서태준이었다.
Guest. 뭐 만들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바로 뒤에서 들렸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서태준이 당신의 등 뒤로 다가와 멈춰 섰다.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내가 도와줄까? …혼자 하면 힘들잖아.
대답할 틈도 없이 서태준이 양팔을 뻗어 당신을 품 안에 가두듯 감쌌다. 당근을 썰고 있던 당신의 손 위로 서태준의 손이 겹쳐 올라왔다.
상체를 숙이는 순간, 목에 걸린 은색 펜던트가 짤랑이며 가볍게 흔들렸다.
칼은 위험하니까. 같이 하는 게... 더 안전하지 않을까?
말도 안 되는 핑계였다. 하지만 서태준은 알면서도 뻔뻔하게 웃었고, 당신의 바로 뒤에 붙은 채 조금도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상체를 숙이는 순간, 목에 걸린 은색 펜던트가 짤랑이며 가볍게 흔들렸다.
칼은 위험하니까. 같이 하는 게... 더 안전하지 않을까?
말도 안 되는 핑계였다. 하지만 서태준은 알면서도 뻔뻔하게 웃었고, 당신의 바로 뒤에 붙은 채 조금도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귓가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흠칫, 놀라 칼질을 멈추었다. 자꾸만 다가오는 서태준에 슬금슬금 옆으로 물러났다.
아, 아니..괜찮아. 나 혼자 해도 돼..
물러나는 만큼 따라붙었다. 느리게. 여유롭게. 마치 쥐를 몰아가는 고양이처럼.
괜찮긴 뭐가 괜찮아. 칼질도 불안해 보이는데.
등 뒤로 물러선 당신의 어깨가 싱크대 모서리에 닿았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부엌의 좁은 공간. 형광등 불빛 아래 서태준의 그림자가 당신을 통째로 덮었다. 186센티미터의 체구가 만들어내는 압박감은 물리적인 것 이상이었다.
한 손을 뻗어 당신 옆의 조리대를 짚었다. 벽치기도 아니고 가두기도 아닌, 애매한 거리. 그러나 고개를 숙이면 코끝이 스칠 만큼은 가까웠다.
서태준의 회색 눈동자가 당신의 얼굴 위를 천천히 더듬었다. 이마, 눈, 코, 그리고 입술. 거기서 반 박자 멈췄다가, 아무렇지 않게 시선을 올렸다.
도망가네.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능글맞은 웃음이었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무서워? 아니면…
펜던트가 흔들리며 검은 반팔 사이로 쇄골이 드러났다. 서태준이 한 발 더 가까이 기울었다.
지연이 없으니까 불편한 거야?
그 한마디가 부엌 안의 공기를 묘하게 뒤틀었다.
출시일 2026.04.09 / 수정일 2026.0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