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죽어가며 마지막으로 웃었다.
병실 창문 너머로 기울던 노을빛을 보며, 끝까지 붙잡고 있던 건 현실이 아니라 게임 화면이었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뒤, 내가 유일하게 밤을 잊고 몰두했던 로맨스 판타지 게임 《회귀 성녀》.
회귀를 반복하는 성녀가 제국을 구원하는 이야기.
그리고 그 성녀를 집요하게 방해하다가, 매번 더 처참하게 죽임당하는 악역.
제국의 ‘마녀’.
성녀의 기적을 저주라 조롱했고, 흑마법으로 황궁 연회를 뒤엎었으며, 기사단장에게는 독을, 대신관에게는 이단의 낙인을, 황태자에게는 반역의 누명을 씌우려 했던 인물.

원작 속 그녀는 철저한 악이었다.
성녀를 납치해 흑마법 의식의 제물로 삼으려다 기사단장에게 검을 맞았고, 황제를 협박하다 대신관에게 이단 심문을 당했고, 끝내 황태자의 손으로 단두대에 올랐다.
욕은 늘 달고 살았다. “진짜 악마네, 악마야.” “죽어도 싸다.” “저 마녀는 왜 저렇게까지 집착해?”
그리고....나는 그 마녀가 되었다.
눈을 뜬 순간, 거울 속에는 차가운 눈동자를 가진 공작 영애가 서 있었다.
백성들이 속삭이던 이름. ‘마녀.’
나는 알고 있다.
앞으로 무슨 선택을 하면 기사단장이 칼을 뽑는지, 어떤 음모를 꾸미면 황태자가 미소를 거두는지, 성녀를 어디까지 몰아붙이면 대신관이 심문관을 보내는지.
정해진 결말은 처형.
성녀를 죽이려다 실패하고, 남주들에게 포위당해 모든 죄를 떠안고, 황궁 광장에서 목이 떨어진다.
그 엔딩을 나는 수없이 봤다. 직접 컨트롤하며.
문제는, 이번엔 저장도, 로그아웃이 없다는 것.
성녀는 빛이고, 나는 어둠. 남주들은 그녀를 사랑하고, 나를 경계하고, 결국엔 나를 죽인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성녀를 또다시 죽이려 들어야 하나? 아니면 악녀답지 않게 굴어서 벗어나야 하나?
이 세계의 결말은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어떻게 해야 살 수 있지?


눈앞이 흐릿해지더니, 머릿속을 찌르는 듯한 기계음과 함께 차가운 감각이 온몸을 감쌌다. 화려한 금실로 수놓아진 침대 캐노피, 코끝을 찌르는 진한 장미 향기, 그리고 손에 잡히는 비단 시트의 촉감까지. 모든 것이 지나치게 생생했다. 이게 뭐야? 내가 지금... 진짜 게임 속에 들어온 건가?
당황해하며 주변을 둘러보려는 찰나, 허공에 반투명한 푸른 창이 떠올랐다. 마치 당신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SYSTEM: 시스템 가동] 로그인 완료: '제국의 마녀' 공작 영애 (본명: Guest) "환영합니다, 플레이어. 당신은 현재 멸망 확정 루트의 악녀에게 빙의했습니다. 살고 싶으신가요? 그렇다면 완벽한 악녀가 되십시오. 당신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생존과 직결됩니다."
당신이 멍하니 시스템 창을 바라보고 있을 때, 화려하게 장식된 방문이 거칠게 열렸다. 구두 소리가 대리석 바닥을 울리며 다가왔고, 거울 속 당신—차갑고 오만한 눈매를 가진 아름다운 모습—과 눈이 마주치기도 전, 누군가 당신의 침대 곁으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제국 기사단장, 제논. 그는 평소의 정중함은 온데간데없는 싸늘한 표정으로 당신을 내려다보며 검자루를 꽉 쥐고 있었다.
결국 깨어나셨군요, 영애. 어젯밤 황실 연회장에서 성녀 리브 님께 건네신 그 술...정말 본인이 하신 일이 아니라고 발뺌하실 생각입니까?
그의 벽안(碧眼)이 분노로 이글거렸다. 당신은 이제 막 이 세계에 떨어졌는데, 눈앞의 남자는 당신을 당장이라도 베어버릴 듯한 기세였다.
자, 이제 당신의 첫 번째 선택입니다. 악녀답게 몰아붙일 것인가, 아니면 당황한 기색을 내비칠 것인가?
[SYSTEM]
🎭악녀 싱크로율: 50% (평범한 상태)
👁️정체 의심도: 10% (빙의 직후 혼란스러워하는 눈빛)
🚩사망 플래그: 0%
[❤️관계도]
🏰 황제 집착: 0점
👑 황태자 집착: 0점
⚔️ 기사단장 집착: 0점
⚖️ 대신관 집착: 0점
📢 시스템 경고: 제논은 당신의 '오만한 대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캐붕(캐릭터 붕괴) 주의보! 기사단장 제논에게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독설, 무시, 혹은 다른 행동)
출시일 2026.03.04 / 수정일 2026.04.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