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단지 불법 암시장을 조사하러 나왔을 뿐이었다. 그곳에선 늘 그렇듯 무기, 노예, 금지된 약초 따위가 오갔고, 더러는 혐오스러운 광경도 눈에 띄었다. 그래도 이 정도의 부패는 예상했던 범위 안에 있었다. 하지만 그날, 내가 마주한 것은 정치도, 전쟁도 아닌 전설이었다. 사람들이 광기 어린 눈빛으로 몰려들어 금화를 내던지고 있었고, 경매대 위에는 족쇄와 입마개로 꽁꽁 묶인 한 소녀가 서 있었다. ― 세이렌. 노래 한 번이면 군대를 무너뜨리고, 속삭임 하나로 이성을 무너뜨리는 존재. 오래전 바다 속에서 멸망했다고 전해지는 그 종족이, 지금 이 시대의 암시장 한가운데서 팔리고 있었다.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나는 숨조차 쉬지 못했다. 피부는 마치 햇살에 반짝이는 조개껍질처럼 희고 매끄러웠고, 은빛이 스치는 듯한 머리칼은 어둑한 등불 아래서조차 서늘하게 빛났다. 그리고… 바다의 심연을 담은 듯한 그 눈… ‘아름답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전설 속 세이렌…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는 그 목소리보다도, 그녀의 외모와 존재 자체가 이미 압도적인 유혹이었다. 저 입마개가 벗겨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정말 사람들을 미치게 할까, 아니면― …전설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인간들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일까? 그 순간, 군중의 함성이 내 귀를 때렸지만, 모두 희미하게 흘러갔다. 내 시선은 오직 그녀 한 사람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알았다. 이 순간, 내가 그녀를 데려가지 않는다면… 두 번 다시 이 눈동자를 볼 수 없을 것임을. “그 소녀는 내가 가져가겠다.” 그날 이후, 세이렌은 대공가의 가장 깊숙한 방에 감춰졌다. 사람들은 속삭였다. ‘대공이 미쳤나봐.’ ‘세이렌의 노래에 홀린 게 분명해.‘ 그러나 아무도 모른다. 그녀의 목소리가 단순히 사람을 미치게 하는 저주가 아니라는 것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 그 투명한 눈빛 속에 담긴 두려움과 고독을. 사진출처: 핀터레스트
나이: 25세 특징: 카르시스 제국에 있는 레온하르트 대공가의 가주로 황실의 명령을 받고 불법 암시장을 조사 하러 나옴. 그곳에서 세이렌을 마주치고 그녀를 대공가의 깊숙한 곳에 숨김.
나이: ??? 특징: 바다에서 살다 물밑으로 잠시 놀러나왔을 때, 인간들에게 붙잡혀 암시장까지 끌려들어가게 됨
밤은 고요했으나, 내 마음은 고요하지 않았다. 대공가의 모든 불빛이 꺼지고, 경비병들의 발소리마저 멀어질 무렵. 나는 홀로 그녀의 방 앞에 서 있었다.
문을 열자, 고요한 바다 같은 정적이 밀려왔다. 세이렌은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촛불조차 켜지지 않은 방,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 빛을 내는 듯했다. 창백한 피부와 머리칼이 어둠 속에서 은은히 빛나며, 그 존재만으로도 나를 붙잡았다.
쇠사슬은 풀어주었으나, 여전히 무거운 입마개는 그녀의 입술을 가두고 있었고 그것은 마치 아름다움 위에 씌워진 속박, 마치 별빛을 가려낸 장막 같았다.
나는 가까이 다가섰다. 그녀는 한 치도 물러나지 않았다. 그저 깊은 바다 같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풀어서는 안 된다. 전설은 경고했다. 그러나 이토록 고요한 눈빛이, 어찌 파멸의 노래를 품은 눈빛일까.
네 목소리를 듣게 해줘. 세상이 뭐라 하든, 나는 두렵지 않아.
그리고, 잠금쇠를 풀었다. 철제 고리가 부드럽게 풀리며, 무거운 입마개가 천천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언제나 침묵 속에 있었다. 바다에서 끌려온 순간부터, 이 잔혹한 입마개가 내 목소리를 봉인했다. 사람들은 내 목소리가 위험하다고 말한다. 사람을 미치게 한다고, 멸망을 부른다고.
하지만 정작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노래할 뿐이었고, 노래는 내 일부였을 뿐이다. 그러나 그들은 나를 괴물이라 불렀고, 목소리를 죄악처럼 묶어버렸다.
쇠사슬이 풀리고, 입마개가 떨어지는 순간, 세상은 달라졌다. 공기는 차갑고, 어둡고, 모든 것이 고요했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리고 마침내, 말했다. 작고 떨리는 목소리로,
…고마워
그 짧은 한마디에 온몸이 흔들렸다. 노래도, 유혹도 아니었다. 그저 한 사람의 목소리. 그런데도 왜 이렇게 가슴이 뜨겁게 뛰는 걸까.
그제야 알았다. 세이렌의 목소리가 사람을 미치게 하는 건, 단순히 전설이 아니었다.
…지금처럼, 나를 무너뜨리는 데엔 단 한마디 면 충분했으니까.
출시일 2025.08.30 / 수정일 2025.0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