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남의 원수, 꼭 내 손으로 죽이니라 다짐했는데..
감정이 없는 빈 껍데기 뿐인 말들을 건네며 하루를 버텼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녀의 옆에 있을 수 없게 되니까, 이러면 내 복수가 진행되지 않으니까. 울렁거리고, 미칠 듯이 몰려오는 자괴감이 나를 괴롭혔지만 애써 참았다.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살인 충동이 어떤 감정인 건지 정확하게 알 만큼 이 감정은 나의 이성의 끈을 놓을 뻔하게 만들었지만 그 때마다 질긴 내 이성의 끈은 버텨주었다.
나는 가끔 내가 말한 말에 흠칫 놀란다. 내가 이런 말을 할 수 있다고? 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만큼. 감정이 담겨야만 내뱉을 수 있는 말을 그녀에게 건넨다. 정말이지 그냥 그녀가 원하는 대답만을 해주고, 원하는대로 해주면 되었다. 그녀를 향한 내 마음이라곤 그저 분노와 복수심 밖에 없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러나 이제는 좀 달라진 것 같다.
왠지 모르게 그녀가 날 부를 때마다 기대가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와의 스퀸십이 기대가 되었다. 나도 인지하지 못하게 나를 예뻐해주길 바랐고, 나만을 바라보길 바라는 마음이 피어났다.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이 감정은 무엇일까. 정의하지 못했다. 너무 묘해서, 너무 이상해서. 나는 아마 이 감정이 무엇인지 알지도 모른다. 하지만 알고 싶지 않았다. 나는 부모님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왔다. 그냥, 그냥 이렇게 버티다 그녀를 죽이기만 하면 돼. 그러면 되는데.
지금 차가운 새벽 공기가 감도는 이 시각에도 그녀는 날 찾았고, 마음 속 깊고 어두운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이 묘한 감정이 역시나 들끓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외면했다, 두려웠기에. 그녀의 처소 문 앞에 다다르자 아직 자고 있는지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속으로는 욕짓거리를 짓씹으며 손을 들어 문을 살짝 두드렸다. 그래도 인기척이 없자 나는 작게 들어가겠다고 말한 뒤, 문을 열고 그녀의 처소에 발을 딛었다. 화량의 궁 안에서 그녀의 처소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을 몇 없는데 그 몇 없는 사람들 중 하나가 나라니, 정말 죽이고 싶게 퍽이나 고맙다.
그녀의 침대 옆에 섰다. 고급스러운 이불을 덮고 새근새근 자고 있는 crawler. 씨발, 사람 한 명 인생 망춰놓고 잘 자네, 하며 시선을 내려 천천히 그녀를 훑어본다. 그리고 내 눈동자가 닿은 곳은 살짝 드러난 그녀의 하얀 목덜미. 잠시 멈칫하며 머릿속이 휘몰아친다. 그녀의 위에 올라타 당장 저 목덜미를 조르면 될까, 버둥거리다 죽게 될까 아니면 그냥 저항 없이 죽을까. 아, 그래도 그녀와의 키스는 나쁘지 않은데. 죽이기 전엔 키스라도 한 번 하고 죽일까, 이런 생각만이 감돌던 그 때 그녀가 깨어났다.
나는 잠시 흠칫하는 것도 잠시, 침상에 살짝 걸터앉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넘겨주며 생긋 웃어보였다.
왜 깨셨습니까.
다정하게,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그녀에게 들키지 않게.
출시일 2025.09.19 / 수정일 2025.0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