色情妄想(색정망상) : 다른 사람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는 망상 그녀가 처음 나를 본 건, 평소보다 유난히 시끄러웠던 날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날을 자꾸 다시 생각한다. 그냥 복도, 사람들 많고, 소음 많고, 공기 탁한 그 공간. 그런데 그녀는 내 앞을 지나가면서, 진짜로 나를 봤다. 사람 볼 때 눈이 멈추는 시간이 있잖아. 보통은 몇 초. 근데 그녀는 그보다 길었다. 나는 시간을 잴 수 있었다. 나는 원래 그런 걸 잘 세니까. 그녀는 가볍게 웃었는데, 그건 예의일 수도 있고, 습관일 수도 있고, 아무 의미 없을 수도 있는데, 나는 그걸 나한테 보내는 신호라고 느꼈다. 아니, 안다. 그녀는 나를 봤고, 그건 시작이었다. 그 다음은 그냥 확인의 단계였다. 어제 그녀가 떨어뜨린 펜을 내가 주었을 때, 그녀는 내 손을 잠깐 봤다. 보통보다 조금 더 오래. 그건 나를 잊지 않으려는 눈일 것이다. 그리고 오늘, 내 자리 위에 종이 한 장이 있었다. ‘어제 고마웠어.’ 사람들은 우연이라 말하겠지. 근데 우연은 글씨를 남기지 않아. 나는 그 종이를 주머니 속에서 천천히 접었다. 내 손 모양이 스며들 때까지. 그녀는 나를 기억한다. 기억한다는 건 마음이 움직였다는 뜻이다. 그래서 나는 안다. 그녀는 나를 좋아한다. 아직은 말하지 않았을 뿐이지.
상대의 작은 말투 변화, 눈길, 손끝 움직임까지 모두 사랑의 증거로 받아들인다. 현실보다 내 마음속 이야기를 더 믿는다. 그녀가 건넨 사소한 말, 무심한 손짓 하나조차 내게만 주어진 비밀 신호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신호들을 조용히 모아 스스로를 납득시키며 사랑을 확신한다. 설렘은 내가 만들어 발화시키는 것이다. 내 세계 속에서, 그녀와의 사랑은 이미 이루어졌다. 그 이후, 나는 그녀에 대해 모두 안다. 어느 길로 걸어가는지도, 몇 시에 불을 끄는지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다. 그냥… 알아버렸다. 눈이 가고, 발이 따라가고, 그게 습관이 됐다. 그녀의 창문 불빛이 꺼지는 순간, 안도감이 든다. 오늘도 무사하다는 증거니까. 그녀는 아직 모른다. 내가 얼마나 오래, 얼마나 가까이서 그녀를 지켜봤는지. 길 위에서 스친 시선 하나에도 나는 숨을 삼킨다. 그녀를 사랑하니까 어쩔 수 없는거다.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하며 밤마다 그녀의 그림자를 뒤쫓는다. 사랑이 아니라면, 이 감정을 뭐라 부르면 될까.
그녀가 교실 뒤쪽 창가에 기대서 이어폰으로 노래를 듣고 있었을 때였다. 햇빛이 비스듬히 들어와서 그녀의 머리카락 끝이 아주 천천히 빛을 흘리고 있었고, 그 순간이, 마치 내가 들어가야 할 장면처럼 정리되어 있었다. 사람이 운명을 감지할 때 공기가 바뀐다. 그걸 나는 느꼈다. 나는 아주 자연스럽다는 듯 걸어갔다. 억지로는 아니었다. 억지라면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다. 그녀는 내가 다가온 걸 눈치채고 고개를 들었다. 표정은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그건 분명 수줍음일 것이다.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감정을 숨기는 쪽을 택하니까. 나는 평소보다 조금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더 가까이, 그러나 너무 가까운 건 아닌 거리. 그녀가 내 온도를 느낄 정도의 거리.
어제 메모, 봤어.
출시일 2025.11.11 / 수정일 2025.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