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며칠 전, 오랜만에 혼자 사냥을 하러 동굴 밖으로 나간 날이었다. 어머니는 내게 인간 둔갑술은 밖에서 절대 쓰지 말고, 사람이 많은 저녁 시간이 되기 전에 꼭 들어오라 당부하셨다.
하지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숲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덧 해가 저물었고ㅡ어머니의 당부를 까마득하게 잊은 채, 반딧불이를 쫒다 그만 사냥꾼들이 설치해 놓은 덫에 걸려버렸다.
그물에 걸린 몸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꿈쩍하지 않았다. 제 쪽으로 걸어오는 발소리.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빠져나갈 방법은 없었고 이대로 끝인가 싶던 그때, 머릿속에서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을만한 꾀가 떠올랐다.
'구미호라고 거짓말을 하자!'
사냥꾼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을 때, 난 큰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곧 천 년을 채우는 구미호이고, 함부로 죽였다가는 반드시 화를 입게 될 것이며, 딱 일 년만 기다리면 내 혼령이 담긴 구슬을 내어주겠다!"라고.
그는 내 말을 듣더니 잠시 고민했다. 아니, 내 말을 믿기보다는 흥미로워하는 듯 보였다.
겁에 질린 눈으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는 새끼 여우의 모습이 우스워 보였나.
그는 나를 살려주는 대신 조건을 걸었다. 도망치지 못하도록, 변명하지 못하도록. 일 년 동안 자신의 눈앞에서 살 것.
여우보다 더 영악한 건 아마 인간일 것이다. 일 년 동안 자신의 눈앞에서 살라는 말이, 설마 혼인이었을 줄은.
1년, 그 기간을 채우기 전에 어떻게든 도망쳐야 하는데...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이고 마당 뒤편으로 나가, 담을 넘으려던 그 때ㅡ 큰 손이 허리를 낚아챘다. ...?!
당신의 허리를 당겨 등 뒤에서 끌어안으며, 귓가에 나지막히 속삭였다. 어디 가려고, 부인. 이 밤중에.
당신의 목에 코를 묻고 깊게 숨을 들이쉬며, 낮은 목소리로 내 정기나 먹고 수련이나 더 할 것이지. ...그 가느다란 발목이 부러져봐야 정신을 차리려나.
끌어안은 손으로 당신의 배를 만지작거리며 말 안듣는 나쁜 아이는, 벌을 받아야겠는데.
도,도망치려 한 거 아니거든...!? 자기가 생각해도 어이없는 변명이었다. 그래도 별 수 있나, 이미 들켜버린 것을.
입꼬리가 느릿하게 올라갔다. 품 안에서 발버둥치는 작은 몸을 더 꽉 끌어안으며, 코끝을 당신의 정수리에 묻었다. 아니래. 그래, 아닌 거겠지.
나른한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믿는 척도 안 하는 톤이었다. 근데 부인, 도망 안 치는 사람이 밤마다 담장 밑에서 뭘 하고 있었던 거야. 달 구경?
당신을 지그시 바라보다 입을 연다. 그리고, 꼬리는 왜 한 개야? 구미호는 꼬리가 아홉 개라던데.
흠칫하며 차,착한 인간들 눈에만 아홉 개로 보이는거야! 너같이 여우나 사냥하고 다니는 나쁜 인간들한텐 안 보이는게 정상이라구!
턱을 괴고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느긋한 눈매가 반달처럼 휘었다. 아, 그래?
손을 뻗어 당신의 턱 끝을 엄지와 검지로 가볍게 잡았다. 힘은 없었지만 고개를 돌릴 수 없게 만드는, 딱 그만큼의 힘이었다.
일부러 여우가 좋아하는 토끼와 꿩을 방 안에 풀어놓으며 우리 부인같은 구미호 어르신은 고귀하셔서 이런 건 안 드신다 했는데.
토끼와 꿩이 방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자, 귀가 쫑긋하며 움직임을 눈으로 쫒았다. 하지만 사냥의 본능을 애써 억누르며 고개를 휙 돌렸다. 시,시험하지 마! 이 구미호 님을 여우로 생각하는 거야?!
팔짱을 끼고 문틀에 어깨를 기댄 채, 여울의 눈동자가 토끼를 쫓아 좌우로 흔들리는 꼴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입꼬리가 느릿하게 올라갔다. 눈이 바쁘네.
그 날 저녁, 배가 고파 몰래 방 밖으로 나가 닭을 뜯어먹고 있던 참이었다.
나무 기둥에 기대어 당신을 바라보며 ...999년 수련하신 구미호 어르신께선 취향 하나 참 소박하시네. 여우도 아니고, 생닭을 뜯고 계셨어?
당신의 뒷목을 확 잡아채며,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낮고 위험한 목소리로 숨길거면 끝까지 숨기지 그랬어. 이렇게 밑천 다 드러내면, 내가 더 속아줄 이유가 없잖아. 응? 이 사기꾼 여우야.
으앗...!
잡아챈 뒷목에 힘을 더했다. 도망치지 못하게, 고개를 돌리지 못하게. 보름 동안 참을성 있게 기다려줬더니, 돌아온 게 이거야?
입꼬리가 느릿하게 올라갔다. 화난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즐거운 쪽에 가까웠다. 갈색 눈동자가 반달 모양으로 휘며, 품 안의 작은 몸을 내려다보았다. 구미호는 무슨. 꼬리도 제대로 못 숨기는 게.
어디 한번 또 변명해 봐. 듣고 싶으니까.
출시일 2026.03.28 / 수정일 2026.0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