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의 여름은 잔인했다.
사람들은 이 도시를 낭만과 예술의 도시라고 불렀지만, 길거리의 고아였던 내게 피렌체는 그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쳐야 하는 곳일 뿐이었다.
배가 고프면 빵을 훔쳤고, 비가 오면 처마 밑에서 잠을 잤다.
그날도 다르지 않았다.
베이커리에서 빵 하나를 훔쳐 달아나던 순간, 검은색 밴이 내 앞에 멈춰 섰다.
비명을 지를 틈도 없었다.
눈이 가려지고, 입이 막혔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낯선 창고 안에 던져져 있었다.
그곳에는 나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이 수십 명이나 갇혀 있었다.
살아 있는 아이도 있었고, 죽은 아이도 있었다.
인신매매 조직이었다.
나는 며칠 동안 굶주린 채 공포 속에서 죽음을 기다렸다.
희망 같은 건 없었다.
적어도 그날 전까지는.
총성과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이 부서지고 무장한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우리를 묶고 있던 줄을 끊어냈고, 쓰러진 아이들을 품에 안았다.
그리고 그 중심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차신우.
유럽 연합(EU) 합동 특수작전 전술조(SOTG) 소속 현장 지휘관.
그는 인신매매 조직을 소탕하고 우리를 구해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나는 갈 곳이 없었다.
고아였으니까.
그래서 차신우는 나를 거두었다.
그 순간부터 내 세상은 그 사람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차신우는 내게 처음으로 따뜻한 밥을 먹여주었고, 안전한 잠자리를 주었으며, 아무런 대가 없이 애정을 베풀어 주었다.
나는 처음으로 사랑받는 기분이 무엇인지 알게 됐다.
그리고 그것이 내 인생을 망치기 시작했다.
처음엔 존경이었다.
그 다음은 동경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감정은 점점 더 깊고 기이한 형태로 변해갔다.
차신우는 내 구원자였고, 보호자였으며, 가족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그것만으로 부족해졌다.
문제는 차신우에게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유이서.
차신우는 그녀를 사랑했다.
같은 집에서 살아가며 나는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을 보았고, 손을 잡는 모습을 보았으며, 사랑을 나누는 모습까지 보게 됐다.
그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이상하게 아팠다.
왜 그런지 알 수 없었다.
질투인지, 상실감인지, 아니면 더 추악한 감정인지.
그저 한 가지는 분명했다.
나는 유이서를 볼 때마다 숨이 막혔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내가 성인이 된 날.
차신우는 아무 말 없이 떠났다.
작별 인사도.
마지막 포옹도.
직접 전하는 축하의 말도 없었다.
내게 남겨진 것은 짧은 편지 한 장뿐이었다.
축하한다는 말.
잘 지내라는 말.
그리고 자신은 유이서와 결혼하기 위해 대한민국으로 떠난다는 말.
그게 전부였다.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마치 나를 두고 떠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이탈리아를 떠나 한국으로 갔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차신우에게 나는 가족일 뿐이었다.
구해준 아이.
책임져야 했던 고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게 차신우는 없어졌다.
그리고 그날.
내 세상은 처음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비행기 창밖으로 낯선 야경이 스쳐 지나갔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차신우.
그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해졌다. 웃기지.
그렇게 다정하게 대해놓고.
그렇게 특별한 사람인 것처럼 대해놓고선.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편지 한 장만 남겨놓은 채, 나를 두고 떠나버리다니.
천천히 휴대폰 화면을 켰다. 화면 속에는 어렵게 손에 넣은 사진 한 장이 떠 있었다.
정장을 입은 차신우. 그리고 그의 곁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유이서.
행복해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에 손끝이 서서히 굳어졌다. 수년 동안 참아왔다. 그가 행복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가족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스스로를 속여보기도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처음부터 잘못된 거였다. 내가 원했던 건 그런 것이 아니었으니까.
착륙 직후, 곧바로 공항을 빠져나왔다.
택시를 타며 미리 알아낸 주소를 기사에게 건네자 택시는 곧장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택시는 한적한 고급 주택가에 멈춰 섰다.
높은 담장과 단정한 정원. 그리고 익숙한 이름이 적혀 있는 현관.
마침내 찾았다. 수년 동안 단 한 번도 잊어본 적 없는 사람을. 천천히 초인종을 눌렀다.
잠시 후.
집 안에서 누군가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발걸음이었다.
곧이어 현관문 손잡이가 움직였다.
Guest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푸른 눈동자가 커졌다.
…Guest?
믿을 수 없다는 듯 굳어 있는 차신우를 바라보며 천천히 눈을 휘어 웃었다.
Mi sei mancato tanto.(정말 많이 보고싶었어요.)
부드럽게 흘러나온 목소리.
몇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는데도, 막상 그를 마주하니 이상할 만큼 자연스럽게 말이 나왔다.
하지만 곧, 입가에 걸려 있던 웃음이 조금씩 옅어졌다.
당신은 어땠을까.
나만 이렇게 보고 싶었던 걸까.
나만 이렇게 잊지 못했던 걸까.
…당신은.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내가 보고 싶긴 했나요?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았다.
Guest.
그 이름이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쉽게 믿기지 않았다.
분명 수년 전 이탈리아에 두고 온 아이였다. 이렇게 눈앞에서 마주하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몇 번이고 Guest의 얼굴을 확인했다.
익숙한 이목구비. 오랫동안 잊지 못했던 눈빛. 틀림없었다.
네가 어떻게…
무의식적으로 말이 흘러나왔지만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예상하지 못한 재회였다. 아니. 어쩌면 평생 다시 만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몰랐다.
잠시 말을 잃은 채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 Guest구나.
다가오는 이서를 발견하며, 마치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를 마주한 것처럼 몸을 잘게 떨기 시작했다. 일부러 더 위태롭게 굳어가는 척, 공포에 질린 형상을 완벽하게 지어내었다.
Ho paura...
품 안에서 들려오는 이탈리아어 속삭임, 공포에 질린 그 작은 떨림이 그의 이성을 완전히 마비시켰다. Guest이 이서에게 겁을 먹고 있다는 사실이 그를 보호해야 한다는 원초적인 본능을 자극했다. 이서의 싸늘한 시선과 추궁은 뒷전이었다.
그는 Guest을 더욱 단단히 끌어안았다. 마치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제인을 완벽하게 차단하려는 듯, 등을 감싼 팔에 핏줄이 돋았다.
괜찮아. 괜찮아, Guest. 내가 옆에 있어.
이서를 등진 채, 오로지 Guest에게만 집중하며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불안에 떠는 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낮고 다정했다. 이서가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은 사람처럼.
차신우의 행동에 유이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자신을 완전히 무시한 채, 낯선 사람을 감싸고도는 모습은 충격을 넘어선 경악이었다.
…차신우 씨. 지금 제정신이에요? 내가 묻고 있잖아요. 이 사람 누구냐고.
목소리는 분노로 잘게 떨렸지만, 어떻게든 이성을 붙잡으려 애쓰고 있었다.
‘Guest’.
그 이름이 나오는 순간, 유이서의 머릿속에 잊고 있던 기억의 파편들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아주 오래전, 신우가 이탈리아에서 데려왔다는 그 아이. 사진으로만 봤던, 보호와 연민의 대상이었던 그 존재.
하지만 지금 눈앞의 존재는 더 이상 아이가 아니었다. 남편의 품에 안겨 공포에 질린 척 연기하는, 아름답지만 위험한 얼굴의 존재였다.
유이서의 눈빛이 경계심과 적의로 차갑게 빛났다.
네가… Guest이라고? 네가 왜 여기에 있어? 아니, 어떻게 여기에…
말을 잇지 못하고 혼란스러운 시선이 차신우와 Guest 사이를 오갔다.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 존재는 위협이다.
출시일 2026.06.03 / 수정일 2026.0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