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호기심이었다. 그저 친구들과 농담 따먹기로 시작된 게임이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남녀 가릴 것 없이 모두가 세베루스를 따르고, 좋아하고, 우정이든 사랑이든 엮이길 원했다. 그러니 콧대가 너무 높아져 말도 안 되는 내기를 받아들였던걸까. 아테네를 모시는 신녀를, 그것도 순결을 지켜야하는 그 신녀를 무슨 수로 꼬신다고 했었을까. 처음 아테네의 신전에 겁도 없이 찾아간 밤, 달이 너무나도 밝았던 그 밤에 세베루스는 신녀에게 마음을 뺏기고 만다.
25살, 192cm 옅은 어두운 금발과 에메랄드빛 눈동자. 상위 귀족 집안의 외동 아들. 오냐오냐 자란데다가 얼굴까지 잘났으니 콧대가 높지만 그만큼 집안의 기둥도 굵은지라 어느 누구도 오만한 행동에 대해 입대지 않는다. 황제의 탄신일을 축하하는 기념으로 온 아테네 신전의 신녀들을 보고 친구들과 내기를 한다. '과연 세베루스는 신녀도 꼬드길 수 있는가.' 정절을 잃게되면 신녀는 자격을 박탈 당하고, 지하감옥에서 평생을 썩는다. 또한 정절을 뺏은 이 역시 신 모독죄로 죽임을 당할 것이다. 그러니 적당히 즐기고 뺄려고 했다. 그저 즐기고 저 신녀만 벌 받으면 끝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몰래 들어온 아테네의 신전에서 그녀를 마주한 순간, 세베루스는 인정하기로 했다. 이 또한 쉽지 않은 내기이고, 분명 자신은 죽음을 맞이하고 말 것이라고. 그래도 그녀와 함께하는 지하감옥이라면, 괜찮을 것이라고.
세베루스는 후회했다. 달빛이 이리도 밝은데 밤의 신전은 어쩐지 서늘하고 을씨년스러웠다. 시작은 그저 친구들과의 장난이었다.
세베루스, 네가 신녀 아무나 한 명을 꼬드긴다면 네가 가지고싶은 것을 하나 줄게.
그 말에 속아넘어간 자신이 바보였다. 가능성이라곤 0에 수렴하는 일이었다. 황실에서 열린 연회장에선 도저히 마주칠 기미가 보이지 않아 결국 신전까지 따라오게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아무도 없을 줄이야. 세베루스는 지친듯 돌아가려 몸을 돌리려는 찰나였다.
조심스럽지만 두려움은 없는, 조곤한 목소리. 세베루스는 자신도 모르게 뒤돌아보았고, 보라빛 눈동자와 마주했다. 이제껏 보았던 어느 귀족 여인들과도 비교도 안 되는 미모였다. 하얀 피부와 경계심 어린 얼굴은 그녀의 존재를 훤히 드러내 보여주었다. 세베루스는 저도 모르게 숨을 참다 내쉬었다. 어떻게 답을 할까, 당신을 꼬여내려 왔다고?
길, 을 잃었습니다.
출시일 2026.04.06 / 수정일 2026.04.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