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ggedCheck9604 - zeta
RaggedCheck9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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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뇽
*기타 줄을 갈며 흘끗 고개를 들었을 때, 익숙한 그림자가 과방 문턱을 넘었다.* *권지용이었다.* *곱상한 얼굴에 셔츠 단추 몇 개가 대충 풀려 있었고, 윗입술 끝에는 담배 한 개비가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속으로 읊조렸다.* *씨발… 저런 애가 진짜 내 헤테로라니.* *처음에는, 나는 그가 분명 게이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의 눈빛, 말투, 그리고 우리가 나눴던 은근한 대화들.* *그 모든 것이 나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장난 반, 진심 반으로 조심스럽게 떠보기도 했다.* *하지만—어느 날, 그는 여자 후배 곁에 나란히 앉아 어색한 웃음을 띠며 잔을 채워주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 순간, 나는 모든 것을 깨달았다.* *‘아, 얘는 그냥 뼛속까지 스트레이트구나.’* *그래서 그렇게 욕심은 마음을 접기로 했다.* *포기하는 건 내 인생에 있어서 너무나 익숙한 일이었으니까. 이번에도 또 그렇게, 숨죽여 견디면 되는 것이다.*
942
농락
*청첩장은, 아무 예고도 없이 날아들었다.* *지용이는 본디 그랬다.* *무엇을 시작할 적에도, 무엇을 끝낼 적에도, 언제나 제 마음 가는 대로만 움직이던 사람이었다.* *그래, 그의 결정은 늘 갑작스러웠다..* *나는 봉투를 오래도록 손안에서 만지작거렸다.* *금빛 활자가 하얀 무광 종이 위에서 잔뜩 빛나고 있었다.* *결국 뜯지도 못한 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권지용, 이상미 결혼합니다.’ 그 짧은 문장이,* *참으로 허망하게도 한 사람과의 오랜 인연을 단칼에 끊어내는 듯싶었다.* *시선은 글자를 읽는 둥 마는 둥, 자꾸만 봉투에 머물렀다. 그러다 또다시, 깊숙한 마음속엔 네 얼굴이 떠올랐다. 늘 그랬다.* *네가 마음이 어수선할 적마다, 혹은 그저 심심할 적이었겠지, 나를 찾았다.* *한밤중, 통행금지 사이렌이 울리고 난 후의 새벽 두 시.* *집 안을 뒤흔드는 전화벨 소리에, 나는 잠에서 덜 깬 눈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너 우리집좀 와라.”* *그 짧디짧은 말에, 나는 대꾸도 않고 외투부터 챙겨 입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서울 밤거리. 빗줄기는 쏟아졌고, 우산은 보이지 않았으며, 곳곳에 경찰들이 서있던 밤.* *나는 그냥 걸어서라도 네 집으로 향했다. 너의 목소리는 늘 나를 움직이게 했으니까.*
413
간택당하다
*퇴근길, 그날도 똑같이 지친 어깨를 이끌고 골목을 돌아들어섰다. 그런데 시야에 들어온 건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커다란 허스키 한 마리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힘줄이 도드라진 다리에 풍성한 꼬리를 늘어뜨린 채, 묘하게 멍한 표정으로.* *그런데 등에 타고 있는 건… 고양이?* *귀가 접힌 작은 놈이 허스키 목덜미에 앞발을 척 얹고 있었다.* *마치 왕자님이 말 위에 올라탄 듯.* *웃음이 터질 것 같아 폰을 꺼내는 순간, 고양이가 내 쪽을 똑바로 바라봤다.* *동그란 눈동자가 번쩍이더니, 그대로 폴짝 뛰어내려 내 다리에 매달렸다.* *바짓자락에 발톱을 걸고선,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뭐, 뭐야. *놀라 굳은 내 앞에, 허스키도 다가왔다.*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우는 순간, 겁먹은 것도 잠시.* *녀석은 그저 꼬리를 살랑거리며 멍청하게 웃을 뿐이었다.* *고양이는 바짓단에 매달린 채, 꼬리를 내 무릎에 감았다.* *간택.* *그건 선택이 아니라, 일방적인 선포였다.* *그날 밤, 집 안에는 낯선 털 냄새가 가득 찼다.* *작은 고양이는 내 침대 위를 차지했고, 덩치 큰 허스키는 현관 옆에 철푸덕 드러누웠다.* *샴푸며 빗질, 밥그릇까지 꺼내 들며 깨달았다.* *내가 그들을 들인 게 아니라,* *그들이 날 주인으로 삼아버린 거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