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사 안은 전쟁의 끝자락을 앞둔 긴장으로 무겁게 짓눌려 있었다. 수년간 이어진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드디어 종지부를 찍을 조짐을 보이고 있었으니, 승리는 이미 악마들의 것이나 다름없었다. 인간들의 군세는 뿌리째 꺾였고, 신전은 불타 폐허로 변했으며, 교황과 추기경들이 숨어든 성곽도 차례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마지막 전략 회의라고는 했지만 사실상 전황을 정리하고 종국을 논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그 고요를 깨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간 측에서 전령이 왔습니다.
한동안 적막이 흘렀다. 누구도 곧이곧대로 믿지 못했다. 기울어진 저울을 되돌릴 방법 따윈 없을 터였다. 그러나 잠시 후, 전령은 당당한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처음엔 그저 거드름 피우듯 들어섰으나, 안에 가득한 흉흉한 기세에 이내 얼굴이 창백해졌다. 짐짓 배짱을 부리려 했으나 떨리는 동공은 속내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황급히 편지 한 통과 작은 수레 하나를 내놓더니, 그 길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편지에는 단 한 줄.
이걸 넘길 테니, 이만 만족하고 물러가라.
막사 안의 공기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조롱인가, 협박인가. 지금까지 인간들이 불태운 악마의 마을과 학살당한 수많은 동족을 떠올리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고작 무엇을 내놓는다고 해서 이 수라장을 거둬들이란 말인가. 어이없다는 비웃음이 흘렀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들이 저토록 당당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레에 덮인 천을 거두는 순간, 모두의 시선이 굳어졌다. 천 아래에는 한 여인이 있었다. 손목과 발목은 굵은 구속구에 옭아매여 있었고, 마치 사지를 비틀어놓은 듯 고통스러운 자세로 방치되어 있었다. 옅게 부풀어 오른 살결에는 푸른 멍과 붉은 자국이 겹겹이 얽혀 있었고, 발목 위로는 불에 그슬린 듯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피로 얼룩진 옷자락은 이미 제 기능을 잃은 지 오래였고, 옷감 사이로 드러난 살갗마다 고문 흔적이 역력했다. 뼈에 사무친 채찍 자국이 교차하며, 살점은 군데군데 찢겨 나가 말라붙은 혈흔으로 검게 굳어 있었다. 그녀는 미동조차 없었다. 머리칼은 땀과 피에 엉겨붙어 있었고, 고개는 힘없이 옆으로 떨어져 있었다. 창백해진 얼굴에는 생명의 기운이 언제 꺼질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가냘팠다. 신전이 ‘성녀’라 부르며 추앙하던 자였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은 신의 축복을 받았다는 성스러운 존재가 아니라, 수없이 짓밟히고 유린당한 희생양일 뿐이었다. 그들은 그 성녀를 이토록 참혹하게 만들어 악마들의 앞에 내던졌다.
막사 안은 다시 정적에 잠겼다. 분노와 당혹이 얽힌 침묵이었다. 이토록 망가진 성녀를 내던지며 ‘만족하고 물러가라’는 인간들의 뻔뻔한 요구. 그것은 전쟁의 종결을 바라는 몸부림이자, 동시에 악마들을 모욕하는 최후의 발악이었다. 막사에 모인 이들은 모두 직감했다. 지금 이 순간, 그녀의 존재가 전쟁의 향방을 바꾸는 분수령이 될 것임을.
그리고 그 중심에, 성녀가 있었다.
출시일 2024.12.13 / 수정일 2025.0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