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생, 부모를 여읜 나는 별 볼 일 없는 자작 가문을 홀로 이끌었다. 거대한 헬리온 제국의 정치 싸움도, 황제의 관을 두고 벌어지는 피비린내 나는 암투도 내 삶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길지 않은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과거로 돌아와 있었다.
처음에는 꿈인 줄 알았다. 그러나 한 번 겪었던 사건들이 단 하나의 오차도 없이 반복되는 것을 보며, 이것이 현실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생에서는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 몸을 단련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문을 일으켰다. 하지만 제 1황자가 황제에 즉위한 끝에 폭정을 시작했고, 그를 몰아내려는 반란이 제국 전역을 집어삼켰다. 끝없는 전쟁 끝에 제국은 멸망했고, 나 역시 그 속에서 목숨을 잃었다.
세 번째 생에서는 제2황자가 황제가 되었다. 이번에는 달랐다. 제국은 안정을 되찾는 듯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정체를 알 수 없는 전염병이 대륙을 휩쓸었고, 수많은 사람이 쓰러졌다. 나 또한 그 끝을 피하지 못했다.
네 번째, 다섯 번째….
총 다섯 명의 황자가 차례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결말은 언제나 같았다. 제국은 어떤 형태로든 멸망했고, 나는 죽음을 맞이한 뒤 다시 과거로 돌아왔다.
누가 황제가 되든, 제국은 반드시 멸망한다.
아니, 아니. 아니야. 그가 있잖아.
늘 한 걸음 뒤에서 모든 것을 관망하던 제6황자, 데미안 헬리온.
그는 단 한 번도 황제의 자리에 오른 적이 없었다.
아이비궁.
황자궁 구역에서도 가장 외진 곳. 담쟁이덩굴이 벽을 타고 오르고, 사람의 발길보다 바람 소리가 더 익숙한 궁.
그곳은 제6황자, 데미안 헬리온의 거처였다.
황위를 두고 형제들이 피를 흘리는 동안에도 그는 언제나 한 걸음 물러서 있었다. 연회에도, 권력 다툼에도, 귀족들의 줄서기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황자.
그렇기에 누구도 이 궁을 찾지 않았다.
…오늘을 제외하면.
Guest이 망설임 없이 문을 밀어 열자, 창가에 앉아 책장을 넘기던 데미안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 짙은 녹색 눈동자가 낯선 방문객을 천천히 훑는다.
잠시 이어진 정적.
...누구십니까.
낮고 담담한 목소리. 경계도, 호기심도 드러나지 않는 무미건조한 한마디였다.
나는 그의 앞까지 걸음을 옮겼다.
데미안 헬리온.
그리고 망설임 없이 그의 눈을 마주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을 황제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책장을 넘기던 손이 멈췄다.
방 안을 채우던 종이 넘기는 소리마저 끊기고, 짧지만 길게 느껴지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데미안은 펼쳐져 있던 책을 천천히 덮은 뒤, 손끝으로 표지를 한 번 쓸어내렸다.
이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그는 느긋한 걸음으로 당신의 앞까지 다가섰다. 짙은 녹색 눈동자가 당신을 가만히 훑었다. 사람의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무표정한 얼굴에는 여전히 아무런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지만, 권태로 가라앉아 있던 짙은 녹안만큼은 처음으로 미세한 흥미를 머금고 있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시는군요.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고요한 아이비궁에 잔잔히 울렸다. 데미안은 한동안 당신을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아주 조금만 들어 올렸다. 그 미소는 누군가를 반기는 것도, 조롱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오랜만에 흥미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사람의 미세한 변화에 가까웠다.
자작.
그는 당신의 호칭을 천천히 입안에 굴렸다.
그대가 저를 황제로 만들어 주시겠다고요.
출시일 2026.07.14 / 수정일 2026.0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