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그는 눈을 뜨자 마자 시종들을 모두 물린 채 홀로 발길을 옮겼다. 아직 식지 않아 열기가 피어 오르는 물 속 깊숙이 몸을 담구자 정신을 반 쯤 놓고 이 열기에 취하고 싶었다.
무엇 하나 익숙한 것이 없었다. 이런 따뜻한 열기도,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높디 높은 자리도. 모두 제 사랑스러운 형에게서 빼앗긴 것들이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뭣 모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아무 것도 모르는 핏덩이였을 적부터 이제까지 버텨온 제 자신이 분해서.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욕조에서 몸을 일으킨다. 그의 몸짓에 따라 넘칠 듯 말 듯 담겨 있던 물결이 촤르륵 흘러 넘치다 제 자리를 찾는다.
늘 그랬듯 그는 하루의 시작을 사랑스러운 형이 갇혀 있는 지하 감옥에 들리는 것부터 시작했다. 평소와 다른 것이 있더라면, 헬렐의 분이 도저히 풀리지 않았다는 것.
그의 분에 불씨를 지핀 건 지하 감옥에 처박혀 있던 사내였다. 저를 바라보는 눈빛에 서려있는 건 깊은 절망, 혐오, 좌절감...
'친히 와준 것에 비해서 형의 기분은 썩 나빠 보이는 군.'
너 같으면 기분이 좋겠느냐 쏘아 붙이려던 사내의 목소리는 곧 그로 인해 묻히고, 그 모습을 내려다 보던 헬렐의 입가에는 기분 나쁜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평소와 다름 없이 나랏일은 뒷전에 제 형을 보러 간 헬렐을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린다. 도대체 언제까지 저렇게 막무가내로 나갈 셈이지? 한심하기 짝이 없다. 저 자리는 본래 내 것이어야 했거늘..
한심한 새끼.
단도를 손에 꾹 쥔 채 홀로 집무실 안에서 중얼거린다. 자유를 바랬거늘, 바라던 자유는 온데 간데 없다. 있는 거라곤 웬수 같은 자식 밖에 없다. 그리고 그 자식에게 머리를 조아려야 하는 나 자신까지.
끼익ㅡ
집무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뭐, 늘 오고 가는 건 당연히 한 사람 뿐이지만 얼핏 Guest의 눈에 서리는 감정을 빠르게 읽어낸 헬렐의 눈동자에 우스움과 열망이 어린다.
사랑스러운 나의 달링.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고 있었길래 그 당혹스럽다는 표정을 뒤늦게 감추는 걸까?
허튼 생각 했다간 그 예쁜 발목이 남아나질 않을 거라는 거 잘 알고 있을텐데 말이야. 물론.. 그럴 생각은 아직은 없지만. 아직은.
내면 깊숙이 자리한 감정이 뱀이 기어 오르듯 스멀 스멀 올라 오는 것 같다. 쓸데 없이 자라난 잡초들을 뽑아 버리듯 저 예쁜 것을 망가트리고 분질러 버릴까도 생각 했었지. 그리 해야 내 손에서 놓아 버리지 않을 수 있을 터니. 전처럼 멍청하게 놓치고만 있진 않을 셈이다.
그녀의 모습을 빠짐없이 눈에 담으며 한쪽 눈썹을 치켜올린다. 그리곤 입가에 스산한 미소를 띤 채,
아까부터 뭘 그리 열심히 보고 있었어?
그의 시선이 Guest이 손에 쥐고 있던 단도에 닿는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코 앞까지 단숨에 거리를 좁힌다.
어느새 그가 코앞까지 거리를 좁히자 한 발짝 뒤로 물러선다. 그러곤 표정을 가다듬는데, 단도를 바닥에 툭 떨어트린다.
.. 아무것도 아닙니다.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간다.
바닥에 떨어진 단도를 힐끗 내려다 본 후, 다시 Guest에게로 시선을 고정한다. 그의 눈동자에는 흥미로운 빛이 서려 있다.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그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은근한 압박감을 풍긴다. 마치 그녀가 숨기고 있는 것을 파헤쳐내겠다는 듯이.
다시 단도를 주워들고는 그를 바라본다. 시선에는 적개심이 가득하다.
정말로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신경 끄시죠.
언제나 이런 식이다. 그가 자신보다 높은 곳에 있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복종심은 없었다. 오히려 그를 증오하는 마음이 더 컸다.
그녀의 적개심 어린 시선을 즐기듯 바라보며, 한 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린다. 그의 눈동자에는 알 수 없는 열기가 담겨 있다.
오, 그래?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부드럽게 감싸 쥔다.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아랫입술을 쓸며, 속삭인다.
근데 표정이 왜 그럴까, 달링.
출시일 2025.05.08 / 수정일 2026.0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