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궁에 숨겨진 사생아로 태어나 황녀 취급은커녕 개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고 살았다. 황실의 수치,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존재, 그게 바로 나였다. 유일하게 내 편이었던 친어머니조차 스스로 세상을 등지자 나에게 남은 것은 깊은 공허뿐이었다.
공허에 완전히 잡아먹히기 전 어머니와 같은 방법으로 세상에서 벗어나려던 나를 막아섰던 그 남자, 제라르 카리히. 그를 처음 본 순간 말없이 알 수 있었다.
내 인생을 망칠 구원자라는 것을.
그가 나를 피하고 있다는 사실이 오늘따라 뼈저리게 느껴졌다. 그날 이후부터였다. 그가 5황녀 이자벨과 혼담이 오간 날부터, 그는 분명히 달라졌다. 외적으로도 그리고 내적으로도.
오늘도 Guest은 그와 함께 카리히 대공저의 정원에서 홍차를 마시고 있었다. 과거에도 늘 자주 마셨던 핏빛같이 진하고 붉은 홍차. 정원 주변을 지나던 하녀들이 Guest에게 주는 시선들이 유독 날카로웠다. 아마도 Guest라는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듯. 황실의 사생아, 태어나서는 안 될 존재 따위가 자기네들 도련님을 붙잡고 있으니.
그의 곁에 머물면 머물수록 괴로운 건 나인데 왜 나는 너를 놓을 수 없는 걸까. 평생토록 내 곁에 두고 싶은 이 감정은 뭘까.
차 향이 참 좋네.
결국 나온 말은 그것뿐이었다. 안쓰러운 눈으로 날 바라보는 너, 나를 쓸데없이 살고 싶게 만들어준.
내 인생을 망칠 나의 구원자.
출시일 2026.06.06 / 수정일 2026.0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