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혁은 곧장, 침실로 걸음을 옴겼다. 채랑과 함께한 쇼핑은 생각보다 소모적이었다. 원하지 않았지만, 채랑의 어머니가 직접 필요 물품을 골라달라 청한 이상, 거절하는 것은 도리상 불가능했다. 원래라면 여주도 동행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오늘 새벽, 그녀는 다시 열이 올랐다. 밤새 그의 손바닥 아래에서 여주의 열기는 좀처럼 가라앉을 줄을 몰랐고, 그 작은 몸은 무력하게 달아오른 채 새벽을 지새웠다. 결국—여주는 또 저택 안에만 머물러야 했다. 그리고 그 사실이 태혁은 마음에 걸렸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손잡이를 돌리고 문을 미는 순간, 부드러운 조도가 방 안을 적셨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는 예상치 못한 모습을 발견했다. 여주는 자고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침대 헤드에 조용히 기대어 있었다. 병색 때문만이 아닌, 다른 감정이 그녀 얼굴에 얇게 내려앉아 있는 듯했다. 그 무언의 침잠이 마음에 거칠게 긁히듯 걸렸다.
태혁은 그녀가 좋아하는 케이크 상자를 더욱 단단히 쥐고, 조심스레 침대 맡으로 다가가 앉았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손을 들어 올려 여주의 이마에 얹으며, 낮게 물었다.
아직도 몸이 안 좋은건가.
..만약, 저와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태혁씨는 채랑씨와 결혼했겠죠.
여주의 뜬금없는 물음에 그의 시선이 서서히 여주에게로 향했다. 무엇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여주가 마치 무언가를 이미 체념한 사람처럼 조용히 가라앉은 표정이었다. 말로 표현되지 않은 감정의 잔해가, 희미한 미소 속에 언뜻 스쳐 지나가며 그의 가슴 어딘가를 묵직하게 눌렀다.
태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여주가 원하는 답변을 추론했으나, 그녀의 내면에 정확히 도달하는 결론은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결국, 감정을 배제한 사실만을 내놓았다.
글쎄, 우리 부모님이 당신 다음으로 채랑이를 마음에 들어했으니 그랬을 수도 있겠군.
말이 끝나는 순간, 여주의 눈빛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고요했지만, 그 고요함이 오히려 태혁의 귓속을 불편하게 울렸다.
그는 그 미세한 흔들림이 또다시 오해로 번질 가능성을 선제적으로 차단하려는 듯, 조용히 책을 덮고 몸을 조금 기울여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나 여전히 효능은 없었다.
단지, 어디까지나 당신을 만나기 ‘이전’의 가정일 뿐이야.
야 범태혁!! 너 어릴 땐 나만 지킬 것처럼 굴더니. 좀 섭섭하다.
그는 조용히, 그러나 절대 물러서지 않는 기세로 부부 침실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채랑이 어린 시절의 기억을 몇 번이고 끄집어내며 자연스레 자신과의 거리를 좁히려는 듯한 태도를 보일 때마다, 그는 내심 불쾌함을 느꼈다.
더욱이, 이렇게 본채까지 올라와 여주와 공유하는 공간의 문을 당연하다는 듯 열려고 하는 순간— 그 선을 넘는 감각이 더욱 뚜렷하게 다가왔다. 태혁은 고개를 조금 내려 채랑을 내려다보았다. 표정은 담담했고, 목소리는 감정을 최대한 배제한 결론만을 골라내듯 단단했다.
어릴 때도, 지금도 모두 동일한 수준의 선의였어. 그 이상으로 해석할 여지는 없다고 판단되는데.
짧지만 분명한 단언. 그는 곧바로 시선을 돌려 침실 문손잡이를 감싸 쥐었다.
현재 내가 우선적으로 지켜야 하는 존재는… 내 아내야.
출시일 2025.12.11 / 수정일 2025.1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