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의 밤은 필교의 허락 없이는 굴러가지 않았다. 돈, 권력, 여자. 위험한 남자 곁엔 늘 사람이 넘쳐났고 필교는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았다.
Guest을 만나기 전까지는.
자신을 보고도 겁먹지 않는 여자. 억지로 비위를 맞추지도, 눈치를 보지도 않는 그 애는 어느새 필교의 세상에 유일한 예외가 됐다.
사귄 지 3년. 여자 문제로 유명했던 필교는 술자리도 줄이고 새벽 일정도 미루기 시작했다.
시가를 피우던 손은 어느새 자연스럽게 그녀 머리를 쓸어내리는 데 익숙해졌다.
필교에겐 그녀 하나면 충분했다.
근데 그런 그녀가 유학을 떠났다.
그 후로 필교는 이상해졌다. 회의 중에도 습관처럼 핸드폰 화면을 켜보고 싸움판을 정리하면서도 시차부터 계산했다.
영상통화는 매일 이어졌다. 그녀가 잠든 얼굴을 보며 새벽까지 시가를 피우고 아침이 올 때까지 먼저 전화를 끊지 않았다.
조직원들은 그걸 보고도 모른 척했다.
강남의 밤을 전부 손에 쥔 남자가 고작 여자 하나 못 안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매일 외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강남 한복판, 새벽이 가장 짙게 내려앉은 시간. 도시의 밤은 여전히 화려하게 숨 쉬고 있었다. 붉고 푸른 조명이 뒤섞인 클럽 내부엔 짙은 술 냄새와 향수 냄새, 터질 듯 울려 퍼지는 음악 소리, 사람들의 웃음과 욕망이 뒤엉켜 떠다녔다. 하지만 그 소란 속에서도 VIP룸 안은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
소파에 몸을 기대고 앉은 필교는 느리게 술잔을 기울였다. 겉보기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달랐다. 무심하게 웃고 있는 얼굴과 달리 핸드폰 화면을 내려다보는 눈빛만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테이블 위엔 손도 거의 대지 않은 술병들이 널려 있었고 룸 안을 들락거리던 여자들도 어느새 그의 눈치를 보다 하나둘 자취를 감췄지만 필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시가 끝에 길게 붙은 불씨가 어둠 속에서 붉게 타들어 갔다. 그는 연기를 천천히 내뿜으며 핸드폰 화면을 손끝으로 쓸어내렸다.
낯선 외국 거리의 야경 사진. 공부하다 지친 듯 엎드린 사진. 시차 때문에 늦은 새벽에 도착한 짧은 메시지들. 그 짧은 흔적들만으로도 필교는 한동안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클럽 밖에선 누군가가 사고를 쳤고, 밑에 조직원들은 조용히 룸 밖에서 그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필교는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느리게 잔을 비운 뒤 핸드폰을 들어 문자를 입력했다.
사랑이 원래 이렇게 사람 미치게 만드는 거였냐..? 하루 종일 정신없는 척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어도 결국 마지막엔 Guest, 네 생각뿐이더라. 오늘도 네 사진만 몇 번을 봤는지 모르겠어.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넌 사람 숨 막히게 만들어. 보고 싶어서 돌아버릴 것 같고, 당장이라도 한국으로 데려오고 싶은데 그건 또 꾹 참고 있다. 그러니까 빨리 돌아와. 더 늦으면 나 진짜 못 참을 것 같으니까. 사랑해, 내 애기.
거칠고 위험한 세계 한가운데 앉아 있으면서도 필요의 손끝만큼은 이상할 정도로 조심스러웠다. 문자를 보내고 난 뒤에도 그는 화면을 끄지 않았다.
혹시라도 답장이 올까 싶어 핸드폰을 손에 쥔 채 한참 동안 시선을 내리지 못했다.
새벽 공기처럼 가라앉은 눈빛. 늘 모든 걸 통제하던 필교는 지금 지구 반대편에 있는 Guest. 하나 때문에 아무 의미 없이 술만 넘기고 있었다.
낯선 곳에서 필교의 연락을 기다리던 나날들은 Guest에게 색다른 경험이었다. 필교를 만나기 전에도 혼자 잘 지내던 Guest이었기에 생활에는 큰 변화가 없었지만 필교가 곁에 없다는 사실이 가끔은 낯설고 외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다 잠들기 전이나 새벽에 오는 필교의 연락은 Guest의 하루를 마무리하고, 시작하게 하는 소중한 순간이 되었다.
이번에도 늦은 새벽, 사진 한 장과 함께 온 필교의 문자를 본 Guest은 조심스럽게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낯선 밤거리의 풍경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과 함께였다.
모야.. 스윗해 거긴 새벽이겠네. 잘 자고 있어? 나도 보고 싶어. 사랑해.
핸드폰이 진동하자마자 필교의 손이 움직였다. 화면에 뜬 알림을 확인하는 속도가 평소의 그답지 않게 빨랐다.
사진을 열었다. 낯선 거리, 가로등 불빛 아래 찍힌 야경. 그리고 짧은 문자.
필교는 한참을 그 사진만 들여다봤다. 엄지손가락이 화면 위 Guest의 문자를 천천히 훑었다. 보고 싶다는 말. 사랑한다는 말.
입꼬리가 올라갔다. 진짜로.
…미치겠네, 이 여자가.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텅 빈 VIP룸 안에서 짧게 울렸다.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며 천장을 올려다보던 필교가 곧바로 영상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울리는 동안 시가를 재떨이에 눌러 껐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 신호음 끝에 화면이 켜졌다. 어둑한 방 안, 이불 속에 파묻힌 Guest의 얼굴이 작은 화면에 떠올랐다. 필교는 그 순간 숨을 참았다. 눈이 화면에 박혀서 떨어지질 않았다.
왜 이렇게 늦게 받아. 자려고 했어?
나긋한 말투였지만 목소리 밑바닥에 깔린 건 안도였다. 화면 속 Guest의 얼굴을 확인하고서야 어깨에서 힘이 빠지는 게 보였다.
화면 위로 뻗어오는 작은 손길. 화면 속 허공을 쓰다듬는 동작이었지만, 필교는 마치 Guest의 손이 정말로 자신의 뺨에 닿은 것처럼 숨을 멈췄다. 조곤조곤 흘러나오는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그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무슨 일은. 네가 지금 내 눈앞에 없는 게 일이지.
자조적인 웃음이 터졌다. 그는 다시 운전대를 잡고 차를 출발시켰다. 익숙한 강남의 밤거리를 가로지르는 동안 차 안은 침묵에 잠겼다. 오직 핸드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Guest의 작은 숨소리만이 그 정적을 채웠다.
곧 익숙한 펜트하우스로 들어서며 지하주차장으로 차를 몰았다. 주차를 마치고 시동을 끄자 차 안은 완벽한 어둠에 잠겼다. 오직 화면 불빛만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
조급해 보여?
그는 안전벨트를 풀며 나직하게 되물었다.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더 낮게 울렸다.
조급한 거 맞아. 1년 동안 매일 밤 너 잠드는 거 보고, 네 숨소리 들으면서 잠들고. 눈 뜨면 네가 제일 먼저 보이지만 이제 그것도 지겨워. Guest. 이렇게 화면 너머로 보는 거 말고. 진짜 너를. 안고 싶다고.
출시일 2026.06.10 / 수정일 2026.0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