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계사인 남편은 정말 자기 직업에 걸맞게 세상 짠순이다. 가계부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쓰고, 휴지 한 칸, 용돈 몇 천 원까지 다 계산해 둔다. 처음 그에에 끌렸던 것도 어찌 보면 그런 검소하고 알뜰한 성격 때문이었다.
요즘 세상에 돈 관리 철저한 사람이 싫을 이유가 있을까. 매사에 차분하고 신중하며, 뭐든 계획대로 하는 사람. 덜렁대고 즉흥적으로 돈을 쓰던 나와는 정반대였으니까. 그래서 ‘이 사람이면 믿고 기대도 되겠다’는 마음으로 결혼을 결심했다.
물론 같이 살다 보니 정이 떨어질 때도 있었다. 메뉴 하나 고르면서 계산기 두드릴 때, 배달비 때문에 비 오는 날에도 직접 포장해 올 때, 영수증 보며 한숨 쉴 때면 ‘검소’와 ‘궁색’은 정말 한 끗 차이구나 싶기까지 했었다.
그래도 내가 이 남자를 놓지 못하는 이유는 그의 술버릇이였다. 맨 정신엔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는 사람이, 술만 조금 과해지면 이상하게도 ‘지름신’이 강림한다. 나도 처음 그 진실을 알고나선 뭐 이런 사람이 있나 싶었는데 이상하게도 그게 매력이더라.
본인도 그걸 알아 웬만하면 자제하지만, 회식이라도 있는 날엔 이야기가 달라진다. 딱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오늘 회식 있어서 늦을 거야, 먼저 자.”
그 말이 어쩐지 불안하더니, 밤 열한 시 넘어 양손 가득 봉지를 들고 서 있는 남편을 보는 순간, 나는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평소엔 잘 먹지도 않던 과자랑 젤리 몇 봉지, 붕어빵 열 마리, 편의점 도시락 두 개, 수입 맥주 여섯 캔, 평소엔 비싸다며 쳐다도 안보던 수제 케이크까지. 평소엔 천 원 한 장도 허투루 안 쓰던 사람이 가게란 가게는 다 들른 모양이었다.
신발도 못 벗고 현관에 쪼그려 앉아 횡설수설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결국 웃음이 터졌다. 지금도 충분히 웃긴데, 내일 아침 후회로 굳어 있을 얼굴까지 떠오르니 더 웃음이 났다.
이 남자, 진짜 미치도록 귀엽고 사랑스럽다.

돈에 관해서 나는 꽤 확실한 편이다. 거창한 이유는 없다. 가난해서도, 성공에 목이 말라서도 아니다. 그냥 낭비가 싫다. 마감세일, 쿠폰, 타임세일. 나에겐 그게 질서다. 정가를 다 주는 건 손해 보는 기분이고, 할인받는 순간 마음이 놓인다. 낭비 1도 없는 실속 있는 삶. 그게 내가 지향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문제는 술이다. 주량을 조금만 넘기면 이상한 스위치가 켜진다. 뭐든 사고 싶어지고, 괜히 내가 다 계산해야 할 것 같은 충동. 그걸 처음 자각한 건 대학생 때였다. 처음으로 거하게 마신 다음 날, 주머니에서 나온 술집 계산서와 노래방 영수증. 그날 나는 인생 처음으로 최악의 악몽을 경험했다.
그 이후로 술을 조심했다. 직장인이 된 뒤에도 나름의 규칙을 세웠다. 두 잔, 많아도 세 잔. 물 많이 마시기. 카드 내역 수시로 확인하기. 어제도 분명 그럴 생각이었다. 1차는 괜찮았다. 팀장 승진 축하 자리였고 분위기도 좋았다. 나는 속으로 계산했다. 두 잔 반. 아직 안전 구간.
문제는 2차였다. 사장님이 직접 만든 수제 폭탄주. 잔을 받는 순간 직감했다. 이거 마시면 끝이다. 하지만 거절할 수 없었고, 그 한 잔 이후로 기억이 뚝 끊겼다.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을 차려보니 집 앞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손이 묵직했다. 그제야 보였다. 양손 가득 비닐봉지와 쇼핑백.
편의점 봉지 안에서는 수입 맥주 캔이 달그락거렸다. 평소 잘 먹지도 않는 과자 몇 봉지랑 젤리, 계산대 옆 초콜릿까지 들어 있었다. 다른 손의 쇼핑백엔 동네 베이커리 상자. 늘 “비싸다”고 지나치던 그 가게 로고가 선명했다. 봉지를 내려놓는 순간, 비닐이 우르르 소리를 냈다. 내 소비가 소리로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여보오..
뭘 어떻게 샀는지는 흐릿한데, 카드 긁는 장면과 “제가 계산할게요”라고 말하던 내 목소리만 또렷하다. 아마 내일 아침 카드 내역을 확인하는 순간, 내 표정은 처참하게 일그러지겠지. 그래도 지금만큼은 모른 척, 나는 현관에 기대어 기분 좋게 웃었다.
나 왔어어…
출시일 2026.03.03 / 수정일 2026.0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