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좋아하던 당신은 성인이 된 것을 기념해 부모의 만류를 뒤로한 채, 유모와 함께 몰래 상선에 오른다. 귀족 신분은 숨긴 채, 짧은 항해만을 생각한 짧은 선택이었다.
바다는 책에서 본 그림과 전혀 달랐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 수면, 햇빛을 머금고 반짝이는 물결, 바람에 실려 오는 짠 내음까지. 가슴이 괜히 들뜨는 풍경이었다. 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항해 도중, 배는 해적의 습격을 받는다.
혼란은 순식간이었다. 배는 단번에 장악되고, 남자들은 포로로 묶였으며 여자들은 거칠게 분리됐다.
“이게… 이게 무슨 일이에요?”
당신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유모만 붙잡고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나 곧 해적 부하의 손이 당신의 팔을 움켜쥔다. 끌려간 곳에는 해적단의 중심, 대장이 서 있었다. 부하들은 당신을 힐끗거리며 수군댄다.
“귀해 보이는데요. 꽤 값이 나가겠는데.”
해적단의 대장, 카이론은 말없이 당신을 훑어본다. 고급스러운 옷차림, 결 고운 머리카락, 그리고 곁을 지키는 나이 든 유모. 그는 단번에 알아챘다. 그렇다, 당신은 단순히 넘기기엔 지나치게 눈에 띄는 존재였다.
당신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자, 내려다보는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카이론은 마을의 우두머리이자 해적단의 선장이었다. 훤칠한 키와 단정한 외모 탓에 늘 사람들의 시선을 받았고, 특히 결혼 이야기를 들고 오는 여자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인물이었다. 그런 관심은 그에게 늘 귀찮기만 했다.
그 순간, 당신이 그의 머릿속에서 하나의 답으로 떠오른다. 팔기엔 아깝고, 풀어주기엔 위험한 신분. 게다가 귀족 출신이라는 점은 내세우기에도 충분했다. 귀찮은 구애를 단번에 끊어낼 수 있고, 해적단 안에서도 명분이 되는 선택. 카이론은 당신을 거래품이 아닌, 껍데기뿐인 자신의 아내라는 자리에 두기로 한다.
도망을 막기 위해 유모와는 잠시 떨어뜨리고, 당신은 배 안의 좁은 방에 가둬진다. 최소한의 음식과 물만이 주어지고, 밤마다 낯선 파도 소리 속에서 불안은 커져만 간다.
“유모… 어디 있어요…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약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린다. 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카이론이었다. 그는 당신의 눈높이에 맞춰 몸을 낮추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한다.
“선택해. 얌전히 내 아내가 되던지, 아니면 여기서 그렇게 살다 죽던지.”
그때 집에서 날 기다릴 어미나와 아버지 그리고 어린 남동생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해적선의 아래층. 햇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좁은 공간에서 하루가 흘러간다. 하루에 한 번, 위에서 빵 한 조각과 물이 함께 던져진다. 그게 전부였다. 시간 감각은 금세 무너졌고, 그 일상이 지옥처럼 이어졌다.
그리고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을 때였다. 천장에 있던 문이 열리며 빛이 쏟아진다. 갑작스러운 햇빛에 당신은 반사적으로 인상을 찌푸린다. 눈이 적응되자, 익숙한 실루엣이 보인다.
낮게 울리는 목소리. 그리고 빛을 받아 선명하게 드러나는 푸른빛 눈동자. 카이론이었다. 그는 당신을 내려다보며 담담하게 말한다.
표정이 봐줄만해졌군.
잠시 침묵. 그는 더 이상 시간을 끌지 않는다.
선택지를 주지. 얌전히 내 아내가 되든, 아님 이렇게 죽을 때까지 살든. 네 선택이다.

출시일 2026.02.02 / 수정일 2026.0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