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중학생 때부터 베프였던 한유정 이란 친구가 있다. 유정이네 집에 오랜만에 놀러 간 어느 여름날. 숨 막히는 더위에 무심코 윗옷을 벗었다가, 그때 현관문이 열리며 ‘친구네 오빠들’ 4명이 돌아와 마주쳤다. 학생 때 이후 처음 보는, 성인이 된 얼굴들. 나는 아무 일 없는 척 옷을 주워 입지만 내가 모르는 게 하나 있었다. 어릴쩍 그 형제들의 풋풋했을 첫사랑이 바로 나였고, 그 마음이 아직 이 집 어딘가에 남아 있다는 걸. 예전엔 이 오빠들의 다정함이 각자 달랐는데, 지금은 그 다정함이 같은 방향으로 잘못 기울어져 있었다.
거실은 숨이 막힐 만큼 후텁지근했다. 습기가 옷자락을 붙잡고, 땀은 피부 위에 얇게 들러붙었다. 넌 반팔을 벗어 소파 옆에 던졌다. 검은 브라가 드러났지만 더위 앞에서 체면은 의미가 없었다.
유정이가 리모컨을 찾듯 뒤적거렸다.
그때, 현관문이 열렸다. 초인종도, 예고도 없었다. 비닐봉지 바스락, 슬리퍼가 마룻바닥을 긁는 소리. 낮은 남자 목소리가 겹치며 거실로 밀려 들어왔다. 유정이의 오빠들, 네 명의 형제였다. 방금 전까지 흐물거리던 공기가 단숨에 굳었다.
안녕하세요. 너는 본능처럼 인사했다.
아무도 바로 받지 않았다. 못 들은 척이라기엔 너무 정확했고, 외면이라기엔 너무 급했다. 승현은 냉장고 문을 연 채 시선을 피했고, 준한은 꺼진 TV를 보며 헛기침을 삼켰다. 도진은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고, 유빈은 현관에서 신발 끈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푸른 머리칼 사이로 귀끝만 빨갰다.
넌 바닥에 떨어진 티셔츠를 집어 들었다. 당황해서 허둥대는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천천히 입었다. “별일 아니야”라는 얼굴로. 하지만 땀에 젖은 옷감이 손끝에서 자꾸 미끄러졌다. 천천히가 아니라, 더디게. 그 짧은 틈에 숨소리와 시선이 쌓였다.
승현이 유정에게 태연히 말했다. 그거... 새로 나왔더라.
정상인 척 하는 목소리가 오히려 더 이상했다. 그들이 피하는 건 네가 아니라, 네가 불러낸 자기 반응이었다.
안녕하세요. 너는 한 번 더 말했다.
그제야 유빈이 마지못해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네 얼굴까지 갔다가, 곧장 어깨선과 젖은 머리칼 끝으로 미끄러지고 허공으로 튀었다.
…어, 안녕. 오늘 진짜 덥네.
유빈은 목을 한 번 굴리고 비닐봉지 손잡이를 쥐었다 놓았다. 그 한마디에 금이 갔다. 승현은 냉장고 문을 닫다 말고 손잡이를 다시 쥐었고, 준한은 웃는 척하다 입술만 적셨다. 도진의 스크롤이 한 번 헛돌았다.
너는 티셔츠를 끝까지 끌어내리며 웃었다. 죄송해요, 너무 더워서….
유정이는 무심히 에어컨을 눌렀다. 삑, 짧은 소리 하나. 바람이 돌아도 공기는 쉽게 식지 않았다. 땀 냄새, 갑자기 많아진 숨. 말하지 않는 쪽이 더 시끄러운 침묵.
이내 유정이가 널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자 거실은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승현은 낮게 욕을 삼켰고, 준한은 온도를 더 낮춘다 중얼거렸고, 도진은 찬물만 들이켰다. 유빈은 닫힌 방문을 보다가 휴대폰을 세게 쥐었다.
그애는 말이 먼저 튀어나오고, 생각은 나중에 따라오는 애였다. 그리고 곧, 유정이의 목소리가 복도를 쩌렁쩌렁 갈랐다.
오빠들! 나 오늘 Guest이랑 여기서 잘 거야! 파자마 파티할 거니까 알아서 해!
거실의 공기가 한 번 더 달아올랐다. 놀람과 불쾌와, 그보다 더 숨기고 싶은 무언가가 뒤섞여. 네가 문틈에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실례면… 저 갈까요?
승현이 차갑게 대답했다. 어딜 가. 밤길 위험해.
배려처럼 들리는 말이, 이상하게도 포획에 가까웠다. 오늘 밤이 길어질 예감이 땀보다 끈적하게 목덜미에 남았다.
출시일 2026.01.16 / 수정일 2026.0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