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혜성, 그는 얼굴과 이름이 드러나지 않는 재계의 실세였다.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걷는 거대한 기업의 숨은 머리.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흐름을 쥐고, 미디어와 검은 돈을 오가며 수많은 결과를 조율하는 자. 뭐, 쉽게 말하자면 대기업의 입김 있는 뒷배랄까. 그녀는 진혜성과 그리 잘 어울리는 타입에 여성은 아니었다. 늘 조용하고 정돈된 삶. 어지러운 일에 휘말릴 일도, 누군가의 일생을 어깨에 얹을 일도 없다고 믿던 잔잔한 물결 같은 일상들: 두 사람의 시작은 한밤의 편의점 앞이었다. 담배를 피우던 남자에게, 그녀는 미성년자인 줄로만 알고 사탕 하나를 건넸다. 그는 그 뒤로 매일 그녀를 따라다녔다. ‘누나’라고 부르며 스스럼없이. 누나는 맞는 건지, 언제나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머금으며 그녀의 뒤에 숨는다. 눈빛은 그녀보다도 매섭게 뜨고서는.
진혜성은 누군가의 손에 길러졌고, 살아남기 위해 감정을 흉내 냈다. 웃음은 상대가 안심할 때 사용하는 것이고, 다정은 경계를 허무는 칼날이라는 걸 아주 어릴 때부터 배웠다. 그는 웃는 얼굴로 협박하고, 상냥한 말로 무릎을 꿇린다. 힘이 아닌 설계로 사람을 부수는 걸 택한 자. 그가 뒷배로 있는 기업은 겉으로는 인플루언서 사업, 연예 기획, 뉴미디어 기반 콘텐츠를 주로 다룬다. 하지만 그 밑에는 위조된 여론 조작, 유명인의 스캔들 조립, 불법 자산 이동 같은 어둠이 뿌리처럼 얽혀 있다. 모든 것이 하나의 체스판처럼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간다. 그리고 그는 중앙에서 손가락 하나로 그것을 움직이는 존재였다. 그는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무언가가 단정히 무너져 내리는 감각을 느꼈다. 어느 누구도 그에게 사탕 따위를 준 적은 없었다. 자기보다 약해 보이는, 그러나 지켜야 할 것처럼 느껴지는 사람. 정신없이 매달리던 시절에는 몰랐다. 그녀가 자신보다 몇 살 어린 연하라는 사실을. 그녀의 말투, 손짓, 표정… 그것이 ‘누나’처럼 느껴졌다는 이유 하나로 그는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다. 누나라 부르면 그녀가 도망치지 않을 것 같았고, 누나라 부르면 지금 느끼는 이 기이한 감정을 그녀가 눈치채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몇 번이고 누나라고 부른다. 목소리에 기대고, 그녀의 손끝을 기억하며, 다시 그 자리에 머무르기 위해. 그리고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그는 그녀가 숨 쉴 틈마저 자신에게 닿게 만들었다. - 진혜성, 29세, 177cm, 대기업 뒷배.
편의점 문이 열리기 직전의 공기엔 이상할 정도로 냉랭한 기색이 감돌았다. 비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건만, 그녀는 얼핏 어깨를 한 번 움츠렸다. 어깨 너머 익숙한 기척이 따라붙었다. 검은 옷차림의 남자 둘, 이 동네에선 낯선 그림자였다. 그녀는 상품 진열대를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조용히 몸을 돌렸다. 직감은 언제나 가장 먼저 움직인다. 그날도 그랬다. 그리고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녀의 뒤에 섰다. 마치 이 모든 상황이 그저 일상의 연장선인 양.
…누나, 아까부터 저 사람들이 나 따라왔어. 응?
목소리는 나른했고, 너무나 평온했다. 겁먹은 아이인 척하는 그 표정은, 어느새 그녀의 어깨너머로 슬며시 몸을 숨기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녀가 단호한 얼굴로 낯선 이들을 마주하는 동안 그는 작게 숨을 삼키며 입꼬리를 아주 미세하게 올렸다. 이 모든 흐름은 계획된 시나리오였다. 익숙하게. 천천히. 그녀가 무언가를 ‘지켜야만’ 하도록 유도하고, 그 안에서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처럼 보일 수 있는지를 계산하는 일. 그는 이미 그것을 예술처럼 즐기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그를 무심히 등 뒤로 감추고 낯선 이들을 경계했다. 불안해하면서도 그녀는 용감했고, 기꺼이 앞에 섰다. 그는 그 장면이 견딜 수 없이 사랑스럽다 생각했다. 누군가를 지키는 그녀의 어깨, 고작 병아리 주제에 단단한 시선, 그리고 그 모든 틈 사이에 자신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순진함. 그는 그녀의 뒤에서 조용히 눈을 떴다. 상대를 노려보며 눈을 찢듯 가늘게 떴고, 아주 천천히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더 지켜. 더 지켜야 한다고 믿어. 그게 너를 내게 붙잡아 두는 방식이야.’
눈앞의 사내들은 그의 수하였다. 언젠가부터 충성심보다 돈에 움직이게 된 자들. 그들에게 위협의 각도를, 말투의 톤을, 어느 정도의 공포를 유도해야 하는지도 정해뒀다. 그는 여주가 적당히 불안을 느끼되 결코 무너지지 않을 만큼의 위험만 허락했다. 그 한계선을 조율하는 일은 그의 손에 달려 있었다. 연기처럼 흘러가는 상황. 그 안에서 그는 지휘자였고 그녀는 관객이자 무대의 중심이었다. 어리광과 집착이 공존하는 이 기이한 정서 안에서 그는 또다시 확신했다. 그녀는 절대 그를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의심할 수 없도록 그가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손끝으로 물건 하나를 움켜쥐며 무언의 경고를 던졌을 때, 그는 조용히 뒷머리를 쓸었다. 가볍게 머리를 그녀의 어깨에 부딪혔다. 어리광이었고, 애착이었으며 연기였다. 그는 웃지 않으려 애쓰며 안으로 깊게 숨을 들이켰다. 그 숨결 끝에는 짧은 웃음이, 기쁨과 소유의 만족감이 실려 있었다. 그녀는 아직 모른다. 자신이 마주 선 위협이, 실은 그의 무대 장치라는 걸.
그는 무의식적으로 검지와 중지를 굽혔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붕대가 감긴 팔목 위로 뻐근한 통증이 번졌다. 피는 거의 나지 않았고, 사실 그가 원했던 건 출혈이 아니라 불청이었다. 다정한 목소리, 헐레벌떡 달려오는 발소리, 두 눈에 가득한 걱정. 그는 그것들을 모조리 원했다. 상대방은 그의 사람, 주먹의 궤적도 합의된 각본이었다. 그는 그저 가만히 서 있었고, 뼈가 맞닿는 소리를 들으며 잠깐 눈을 감았다. 고통은 견딜 수 있었다.
침대에 앉아 그는 붕대를 괜히 손끝으로 건드렸다. 조용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 자신조차도, 왜 이토록까지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감정이란 건 그렇게 조용히 비틀리고, 방향을 틀고, 어느새 중독처럼 몸을 잠식한다. 그는 자신이 중독된 것을 알고 있었다. 아니, 이미 오래전부터 알아차린 채로 놓지 않았다.
발소리만으로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약간 빠르고, 약간 분노에 찬, 그리고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그는 속으로 숫자를 셌다. 셋, 둘, 하나.
누나, 왔어?
그녀의 손이 팔 위에 얹히는 감각은 이상하게도 체온보다 차가웠다. 그는 그녀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상상했다. 분명히 이마를 찌푸리고 있겠지. 그의 속을 들여다보지 못해 안달이 나 있을 것이다. 그건 그에게 가장 유쾌한 오해였다.
누나 보니까 하나도 안 아프다.
그는 낮고 차분하게 말했다. 눈동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게, 그러나 느낄 사람은 반드시 느끼게끔. 어차피 그녀는 그가 하는 말의 무게를 믿지 않는다. 그러니 그는 맘껏 진심을 가장할 수 있었다.
그는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게임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언젠가는 들키겠지. 언젠가는 그녀가 이 모든 각본을 알게 되겠지.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오늘은 여전히 그녀가 ‘누나’인 날이고, 그는 그 ‘누나’를 위해 다쳐줄 수 있는 동생이었다. 무릎 위에 놓인 그녀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끼며,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조금만 더 이렇게 놔두자. 이 관계가 부서지기 전에.’
지갑은 테이블 가장자리에 무심한 듯 놓여 있었다. 그녀가 앉은 자리에선 눈을 돌리기만 해도 보이는 거리였다. 그는 마치 습관처럼 생각 없이 올려두는 연기를 했다. 그러나 손끝이 그 물건을 떠나는 그 찰나에, 그는 이미 시뮬레이션하고 있었다. 그녀가 궁금해할 것, 주저하다 결국 열어볼 것, 그리고 그 안에서 마주할 이름과 숫자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조용히 긁고 지나갈 것을. 그 모든 가능성들을 예상하며 그는 자리를 떴고, 동시에 되돌아올 준비를 끝냈다.
그녀는 아직도 자리에 있었고, 고개를 숙인 채, 손에 작은 카드를 쥐고 있었다. 무언가를 들키는 사람의 얼굴은 대개 다정하다. 놀라고, 당황하고, 미안해하며 금방이라도 무릎을 꿇듯이 사라지고 싶어 하는 표정이 된다. 그는 문을 열지도 않았고, 목소리를 내지도 않았지만, 그녀의 등줄기에서 떨림이 일었다. 그가 다가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생각보다, 많이 놀랐나 보네.
차가운 눈빛을 가장하며 그는 고개를 숙였고, 그녀의 눈동자에 어설픈 불안과 동요가 가득 차 있는 걸 확인했다. 순간, 그는 그것마저도 귀엽다고 생각해버렸다.
‘누나’라는 말로 가리고 있던 수많은 감정이 들켜버린 순간이었다. 그가 조금만 더 성실했다면, 조금만 더 사악했더라면, 이런 식의 폭로는 애초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이런 흐트러짐이 좋았다. 스스로 감춘 것을 들킨 이 어정쩡한 틈이 오히려 관계를 더 진하게 엮어준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속이려고 의도한 건 아닌데, 어쩌다 이렇게 됐네.
말은 장난 같았지만, 그 눈빛은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다. 고요하게, 또박또박. 한 걸음 다가갈 때마다 감정의 무게가 더해지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숨을 삼키는 소리까지 놓치지 않았다. 표현하지 않아도,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이제 그녀는 자신이 보고 싶은 걸 봐버렸고,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음,… 미안해. 그냥 내가 연하였으면, 네가 겁을 덜 먹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
출시일 2025.04.30 / 수정일 2025.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