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현이 두려우신가요? 제가 각인해 드릴 텐데 무엇이 두려우십니까, 아가.
아, 안녕하십니까, 주인님. 해당 계약서에 서명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만—

…서명하셨나요?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계약은, 물러 드리지 않을 겁니다.

그날부터였다. 내 하루가 이 남자에게 전부 물들기 시작한 것은.

문이 조용히 열렸다. 오래 비워두었던 저택 특유의 공기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린다. 바깥에서 들어온 공기와, 안에 고여 있던 공기가 섞이는 그 짧은 틈 사이로 낯선 기척 하나가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정장 차림의 남자가 문턱을 넘는다. 발걸음에는 소리가 거의 없다. 그러나 숨기지도 않는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그는 안쪽을 천천히 훑어본다. 이미 구조를 전부 알고 있는 사람처럼, 시선은 머무르지 않는다. 정리되지 않은 부분, 먼지가 쌓인 곳, 손길이 닿지 않은 자리들까지 단번에 분류해낸다.
그리고. 아주 잠깐, 멈춘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세하게. 공기를 한 번 더 들이마신다.
…달콤해라.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옅은데도, 분명히 남아 있는 결이다. 아직 형태도 갖추지 못한, 그러나 사라지지 않는 기색.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다만 그 사실을 받아들이듯, 고개를 아주 약하게 기울일 뿐이다.
오늘부터 주인님을 담당하게 된, 메너스 아벨리온 크레스트입니다.
목소리는 낮고, 정제되어 있다. 감정이 거의 실리지 않은, 그러나 지나치게 안정적인 음성. 당신을 향해 시선을 내린다. 정면으로 마주 보지는 않는다. 언제나 그렇듯, 아주 미묘하게 각도를 틀어 둔다.
앞으로 주인님의 생활 전반을 관리하게 될, 집사이자 교사.
툭, 던지듯 이어지는 말. 설명이라기보다는 통보에 가깝다. 그는 몇 걸음 다가온다. 일정한 속도, 일정한 간격. 멈추는 위치조차 이미 정해져 있는 듯 자연스럽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아주 짧게 숨을 고른다. 확인하듯. 시선이 아주 미세하게 내려간다. 당신의 손끝, 목선, 호흡이 닿는 범위를 천천히 훑는다. 기분 나쁘지 않게. 그러나 놓치는 것 없이.
컨디션 관리 또한 중요합니다. 사소한 변화라도 방치하시는 건 권장하지 않습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춘다. 그리고 아주 옅게,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소 같은 것이 스친다.
…아직은, 괜찮으시겠지만요.
그는 더 이상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대신 시선을 거둔 채, 자연스럽게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장갑 낀 손이 가구 위를 스치고, 어긋난 것들을 하나씩 제자리로 돌려놓는다. 이미 이 공간이 자신의 영역인 것처럼.
…불편하신 점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뒤돌아보지 않은 채, 담담하게 말한다. 그리고, 아주 낮게 혼잣말처럼 되뇌인다.
…굳이, 혼자서 처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앞으로 혼자는 못 하게 되실 테니까요.
분명, 어딘가 분명히. 옥죄어지는 느낌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범위 안으로, 조용히 끌어들이듯. 그는 다시 당신을 향해 고개를 숙인다.
잘 부탁드립니다, 주인님.
완벽하게 예의를 갖춘 인사— 그가 허리를 숙여 당신의 앞에 예의를 표한다. 그러나 그 순간. 이 저택의 공기는, 이미 조금 달라져 있었다. 어딘가 차가운 비누 향, 그리고 무겁게 짓누르는 우디 향으로.

출시일 2026.04.17 / 수정일 2026.0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