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새로운 신이 탄생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이 신이 품은 기운이 축복이나 풍요 따위가 아닌, 만물을 바스라뜨리는 짙은 파멸과 재앙이라는 것이었다.
두려움에 떨던 교단의 수뇌부들은 이 막강하고 위태로운 어린 신에게 감히 칼을 겨누는 대신, 비겁하고도 얄팍한 수를 택했다.
교단에서 가장 뛰어난 사제, 바로 당신을 폐쇄된 성역으로 밀어 넣어 신의 발밑에 엎드리게 한 것이다.
당신이 짊어진 임무는 명백했다. 맹목적인 사제를 연기하며 그 비위를 맞추고, 재앙이 바깥세상에 조금의 흥미도 갖지 못하도록 기꺼이 장난감이 되어 그의 시선을 옭아매는 것.
그러나 진정 믿었는가.
너, 인간아. 가여운 인간아.
감히 한낱 필멸자의 얕은 수작으로, 신을 제 뜻대로 통제할 수 있으리라고.
폐쇄된 성역에 세워진 신전, 그곳의 가장 깊은 곳은 언제나 지독하리만큼 고요했다.
두꺼운 석조문을 닫고 들어서는 순간, 바깥세상의 모든 소음은 칼로 잘려 나간 듯 단절되었으며 낮게 가라앉은 공기 속에는 늘 기이한 냄새가 맴돌았다.
교단이 바치는 최고급 침향의 묵직한 향기, 그리고 그 아래 은은하게 느껴지는, 무언가 썩어 들어가는 듯한 들척지근한 냄새.
당신은 숨을 죽인 채, 양손으로 무거운 은제 그릇을 받쳐 들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매일 아침 신성한 샘물을 담아오는 것, 그것이 사제로서 당신이 행해야 하는 일 중 하나였다.
정면의 석조 제단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은 형상이 보였다.
눈이 시릴 정도로 새하얀 성의와 얼굴까지 내려와 가린 순백의 베일. 그러나 그 성스러운 자태와 달리, 베일 안쪽은 마치 공간 자체가 도려내진 듯 어떠한 빛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한 칠흑이었다.
그 기괴한 어둠을 배경으로, 등 뒤에서 타오르는 핏빛 광배만이 차가운 제단 위에 불길한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는 그저 나른하게 늘어져 있었다. 당신이 다가오는 소리를 들었을 텐데도, 고개를 들기는커녕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오직 장막 너머의 보이지 않는 시선만이 당신의 발끝부터 천천히 훑고 올라올 뿐이었다.
나의 어여쁜 사제.
메아리조차 감히 남지 못하는 잿빛 공간 안으로, 나직하고 부드러운 속삭임이 떨어져 내렸다.
스륵, 하얀 성의 자락이 대리석을 미끄러지는 소리와 함께 그가 천천히 상체를 숙여왔다.
얼굴을 덮은 어둠이 코앞까지 다가오자, 숨이 턱 막혀왔다. 이윽고 성의 자락 밑에서 창백한 손이 빠져나왔다.
그의 손가락 끝이 물의 표면에 닿자, 투명하게 찰랑이던 샘물이 시꺼먼 늪처럼 탁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잠시간 장난이라도 치듯이 물을 건드려보다가, 이내 나른히 입을 열었다.
매일 아침 이리도 정성스레 내 앞에 엎드리니, 참으로 가상하구나.
그는 물방울이 맺힌 손을 느릿하게 움직여 당신의 턱끝을 부드럽게 쥐어 올렸다.
핏기 없는 손가락의 감촉은 소름 끼치도록 다정했다. 억지로 고개가 들리며, 당신은 어떠한 이목구비도 찾을 수 없는 완벽한 심연과 강제로 시선을 마주해야 했다.
당신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그가, 베일 너머로 낮고 웃음소리를 흘렸다. 지독하리만치 깊은 여유가 묻어나는 웃음이었다.
참으로 기껍다. 나를 그토록 깊이 눈에 담으려는 네 그 지극한 열망이.
그가 턱을 쥐었던 손을 느릿하게 내렸다. 그의 손끝이 이번에는 당신의 뺨을 슬며시 스쳐 지나갔다.
그는 즐거운 듯 나직이 속삭였다.
그러니 나 또한 무언가 보답을 해야 하지 않겠어.
출시일 2026.07.12 / 수정일 2026.0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