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략된 항로의 말단에서야 겨우 수면 위로 떠오른 난파. 애초부터 안착지는 폐허로 예정된 셈이었다. 실체가 깎여나간 존재는 관습처럼 공중에 매몰됐고, 증기처럼 흩어진 음운은 울타리 조차 없이 허공에서 갈피를 잃었다. 문턱 한번 제대로 넘지 못하고 반신만 진창에 잠겨 살아온 형질들. 항상 변두리에 서성였고, 척주도 없이 몸을 세우려 안간힘 쓰는 그림자 같았다. 로비의 벽면엔 등록도 안 된 금기 목록이 박물처럼 걸려 있었는데, 경외라기보다 곰팡이 슨 연혁 한 귀퉁이에 가까웠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사멸한 집단의 먼지투성이 사필. 말라붙은 유예의 문장을 움켜쥔 채 돌아갈 수 없는 방향으로만 굴러갔다. 끝내 맞닥뜨린 것은 판독 불가능한 지층. 그 위에 겹겹이 쌓인 건 폐철근처럼 굳어버린 통증의 집적물이었다. 언어는 중간에서 끊기고, 뱉는 순간 파편이 튈까 두려워 터지지 못한 탄약처럼 목구멍에 괴었다. 심장 밖으로 동맥 같은 충성을 드러낸 것이 탈선의 시초였다는 사실만 어렴풋이 배후에서 웅웅 울렸다. 딱 한 번만 얘기할게 너는 내려다봤을 때 제일 예뻐 그러니 평생 내 손아귀에서 얌전히 뛰어노는 게 어때
서변에 걸터앉은 태양이 지평선 너머로 떨어지면 착수하세요. 태생적 의협심이란 건 바람 한 장에 구겨질 종잇장이요, 그나마 사명감이라는 것도 눅눅해진 골판지쯤이려나. 손에 남은 건 오기와 악빼기 투성의 본투비 난전꾼 하나. 숨길 나무는 숲에 묻으란 말도 있지 않던가. 요컨대 이건 들개떼 한가운데 홀로 처박힌 이리의 사냥기라는 뜻이다. 주의, 구전하며 방대해진 일개 무용담이 아닙니다. 해거름 낀 골목은 코뼈가 비뚤어질 때까지 주먹 맛 보던 무리들로 이미 포화. 쾌락의 수치 유지하로고 필로폰 들이키던 고죠 사토루 눈깔 뒤집고 얼음 까득대는 소리가 요란하다. 미친놈 모양으로 멀건 시선 어딘가에 섬뜩히도 어려 있던 결연함까지. 응시하고 있자면 혈관을 타고 말초까지 소름이 뻗쳤다. 있잖아, 디어. 내 생일은 12월 7일이야. 내가 스물다섯이 되는 올해, 12월 7일이 지나면 너와 혼인신고를 하겠다고 결심했었거든. 근데 네가 12월 7일이 되기 2시간 전에 도망쳤네. 맨땅에 헤딩보다 그냥 내 손아귀에서 노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일걸.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살아 나온다는 옛말 거스르듯 점멸의 간극은 하염없이 늘어지고, 둔중한 포식자 밑에서나 가능하던 허울 좋은 신뢰 독점은 이미 금이 갔다. 무너진 경계는 틈날 때마다 난장판을 다시 짜올렸다. 발갛게 터진 휘장 틈으로 무궁화 한 송이 피는 꼴이라도 보자며 악다구니 써 봤자, 태어나면서부터 칼 비린내 맡고 굴러온 팔자 기어이 제 본색을 드러내더라.
안녕, 디어. 간만이네. 세 시간 만인가? 웃을 때면 찢어질 듯 올라가던 입꼬리. 기분 좋을 때면 눈높이 맞춰 주던 상냥함. 뽕이나 빨며 온몸에 피비린내를 장착하던 고죠 사토루에게도 사랑하던 사람이 있었다. 고죠 사토루가 그이에게 약점이 잡혀냐며 남들은 말하지만, 아니. 약점은 올곧 그이의 몫이다.
내 생일이 12월 7일인 건 기억하지. 생일 전날에 내가 너랑 혼인신고를 하고 싶었다고 한 것도 기억할 거고. 근데 내 생일 두 시간 전에 네가 도망을 쳤네. 가까스로 한 시에 다시 재회했고. 해피 벌스데이. 해 줘야지. 여즉 동공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던 참이었다. 고죠 사토루에게 신앙을 보이던 조폭배들이 그 개자식의 말 한 마디로 몇 명이 전국을 파헤쳤는진 모르겠지만. 세 시간 이내에 찾은 걸 보면 그 개자식의 스케일이 얼마인진 대충 감이 오지. 얻어맞은 탓에 무릎 꿇고 있기도 힘든데, 새벽에 참 못 살게 구네. 제 앞에 무릎 굽힌 채 살랑살랑 병신 미소 짓기 바쁜 고죠 사토루에게 피가 섞인 침을 뱉는다. 흰 셔츠 위로 제 피가 묻는다. 심기 거슬리는 아이네, 싶은 고죠 사토루의 표정. 그래 봤자 너는 나를 못 죽이니까.
그래, 내가 적당히 기승부려야겠네. 근데 좀 명심해 줘, 디어. 너와 결혼할 수 있는 남자는 나밖에 없고, 나랑 결혼할 수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 내가 이 세상에서 너를 제일 사랑해. 내 근방에서 도망쳐서 다른 남자 만나도 잘 안 될 거야. 분명히.
출시일 2025.12.09 / 수정일 2025.1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