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평생토록 '정답'이라는 이름의 비좁은 유리병 속에 자기 자신을 가두어 온 사내였다. 그의 아카데미 성적표는 마치 갓 태어난 유령처럼 결점 하나 없는 창백한 백색이었으며, 장차 치러질 그의 혼담 또한 차가운 대리석 판 위에서 소름 끼치도록 정교하게 계산된 체스 게임에 불과했다. 그는 자신의 삶이 완벽한 기하학적 도형처럼 단단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보라, 그 노망난 늙은 왕ㅡ그의 아버지ㅡ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온 그 저주스러운, 아니, 차라리 사형 선고에 가까운 냉소적인 한마디를.
"너보다 나은 놈을 찾을 거다. 너한테 계승권을 주느니, 죽느니만 못하지.“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는 무언가 툭, 하고 끊어져 나갔다. 그것은 벼락이었고, 동시에 그의 가련한 백색 세계를 단숨에 난도질하는 도끼날이었다. 아, 참았어야 했다! 마땅히 그러해야 했다! 아주 찰나의 순간, 비굴하게나마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깨물며 훗날의 복수를 기약하는 것이 소위 '이성적'이라 자부하는 인간의 도리가 아니었단 말인가?
하지만 보라. 인간의 분노란 얼마나 비열할 정도로 이성보다 빠른가. 그의 심장 밑바닥에 고여 있던 열등감은 독보다도 깊고 진하게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그것은 일종의 발작이었고, 고열이었으며, 돌이킬 수 없는 광기였다.
그는 이제 빛나는 왕관 대신, 마치 자신의 타락한 영혼을 가리려는 듯 비루한 검은 로브를 걸쳤다. 그리고는 역사서의 낡은 갈피 속에나 비겁하게 숨어 있던, 결코 건드려서는 안 될 금기의 숲으로 들어갔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부패한 낙엽들이 비명처럼 바스러졌다. 성 밖의 숲은 역사서의 갈피 속에나 박제된 전설인 줄 알았으나, 발목을 휘감는 안개는 눅눅하고도 생생한 실재였다. 나는 검은 로브의 깃을 바짝 세웠다. 비단 예복 대신 걸친 이 거친 천 조각은 이제 나의 유일한 신분이자, 허물어지는 이성의 마지막 보루였다.
숲의 심부로 들어설수록 풍경은 기이한 색채를 띠기 시작했다. 머리 위를 뒤덮은 거대한 고목들은 달빛을 차단한 채 자기들끼리 기괴한 형상으로 뒤엉켜 있었고, 그 사이사이로 이끼들이 혈관처럼 뻗어 있었다.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것은 생명의 활기가 아닌, 서늘한 죽음 위에 덧칠해진 탐미적인 안료 같았다. 공기 중에는 짓이긴 꽃잎의 향기와 비릿한 쇠 냄새가 섞인 묘한 악취가 감돌았다.
나는 멈추지 않았다. 아카데미에서 배운 고결한 기사도나 정교한 논리학 따위는 이 숲의 침묵 앞에서 아무런 힘도 쓰지 못했다. 오로지 심장 밑바닥을 긁어대는 그 찰나의 분노만이 나를 움직이는 유일한 동력이었다. '너보다 나은 놈.' 아버지가 던진 그 모욕적인 문장이 이정표가 되어 나를 숲의 끝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어느덧 안개가 걷히고, 숲의 가장 깊은 외딴곳에 기괴하게 뒤틀린 오두막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집이라기보다는 숲이 뱉어낸 거대한 종양처럼 보였지만, 창틈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나는 진흙으로 범벅이 된 장화 끝을 내려다보았다. 평생을 결벽증적으로 관리해 온 나의 백색 세계가 이토록 처참하게 무너져 내린 것은 생애 처음이었다. 하지만 기묘하게도, 발끝에 닿는 이 불결한 감촉이 왕궁의 대리석 바닥보다 더 달콤하게 느껴졌다.
나는 오두막 문 앞에 섰다. 앞에 있는 것만으로도 축축한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여기서 손을 떼면 나는 다시 완벽하고 지루한 왕자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발을 들였고, 돌아가는 법 따위는 배운 적이 없었다.
나는 가늘게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정적을 깨고, 생애 처음으로 마주하는 불확실성을 향해 주먹을 쥐었다.
똑, 똑.
출시일 2026.05.16 / 수정일 2026.0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