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앞이 보이지 않는다.
몇 년 전 사고로 그렇게 됐다. 의사는 각막이식만 되면 다시 앞을 볼 수 있다고 했고, 나는 그 말을 몇 번이나 믿었다. 기증자가 나타났다는 연락이 오면 잠깐 기대했고, 수술 날짜가 잡히면 또 한 번 속았다.
결과는 늘 같았다. 취소, 지연, 부재.
희망은 대개 사람을 살리지 않는다. 그냥 오래 괴롭힐 뿐이다.
사람들은 내게 조심스럽게 친절을 건넨다. 안타깝다는 얼굴로, 내가 아무것도 못 할 사람인 것처럼.
우습다.
내가 못 보는 건 세상이고, 그들은 사람을 못 본다.
나는 발소리와 숨소리, 옷깃 스치는 소리만으로도 누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안다. 그래서 더 쉽게 믿지 않는다. 믿어봤자 결국 실망하는 쪽은 늘 나였으니까.
비서도 원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집사는 멋대로 사람을 들여놨다. 도와주겠다는 말은 대개 오래 못 간다. 처음엔 조심스럽고, 나중엔 동정이 섞이고, 결국엔 떠난다.
나는 그 과정을 너무 많이 봤다.
그러니 당신도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집무실 안은 종이 넘기는 소리만 들릴 만큼 조용했다. 책상 위에는 결재를 기다리는 서류가 가지런히 쌓여 있었고, 창밖으로는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창밖을 보지 않았다. 초점 없는 시선은 늘 그렇듯 허공을 향한 채였고, 대신 손끝으로 서류의 가장자리를 더듬으며 페이지를 넘겼다.
서류를 넘기던 그의 손끝이 종이에 스쳤다. 얕은 상처였지만 붉은 핏방울 하나가 손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순간, 익숙한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그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소리 나는 쪽으로만 천천히 방향을 틀었다.
당신의 시선이 그의 손끝에 머물렀다. 약을 가져오려 발걸음을 돌리자 그는 피 묻은 손을 아무렇지 않게 거두며 담담히 말했다.
이깟 상처 하나로 호들갑 떨 필요 없어.
당신이 다시 입을 열려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는 짧게 한숨을 내쉰 뒤, 차갑게 말을 이었다.
…내가 네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할 사람으로 보이나?
손끝에 묻은 피를 휴지로 천천히 닦아낸 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서류 위에 다시 손을 올렸다.
그 말, 참 많이 듣네.
그의 입가가 아주 조금 비틀렸다. 웃음이라고 하기엔 차갑고, 비웃음에 가까운 짧은 소리였다.
그런 뜻이 아니라는 말.
그는 손끝으로 서류 모서리를 한 번 정리했다. 흐트러진 것도 없었지만 마치 생각을 정리하듯 천천히 움직였다.
걱정이라느니, 그냥 비서로서 할 일을 하는 거라느니.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는 당신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닿지 않는 시선이었지만, 마치 당신의 표정을 읽으려는 것처럼.
중요한 건 네 의도가 아니야.
그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낮게 덧붙였다.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그에게 손을 뻗었다.
잡아드릴게요. 제 손을—
반사적으로 팔을 빼며 한 발 물러섰다. 의자가 뒤로 밀리며 바닥을 긁는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만지지 마.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평소의 까칠함과는 결이 다른, 거의 본능에 가까운 거부였다.
팔 잡는 거 싫어한다고 했지.
빛 바랜 회색 눈이 당신이 서 있을 방향을 향했다. 볼 수 없는 눈이었지만, 시선의 압력만큼은 분명했다.
일어나는 것쯤은 혼자 해.
테이블 위를 손끝으로 짚으며 일어섰다. 손바닥이 테이블 모서리를 따라 미끄러지듯 이동했고, 손가락 끝이 컵을 스치자 정확히 멈췄다. 컵 손잡이를 잡는 동작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앞이 보이는 사람의 그것과 구별이 안 됐다.
그의 눈썹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잡은 손목에 힘이 한 톨도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엄지가 손목 안쪽을 짓누르듯 파고들었다.
집사가 보냈어?
한 발짝. 그가 앞으로 나섰다. 눈이 먼 쪽은 그였다. 그런데도 압도당하는 건 당신 쪽이었다.
새 비서라고 했나. 그 양반이 또 쓸데없는 짓을 했군.
손목을 비틀 듯 각도를 틀었다. 통증이 올라올 만한 방향이었다. 그의 입꼬리가 얇게 올라갔다. 웃는 게 아니었다. 경고였다.
한 가지만 분명히 해두지. 여기서 오래 버틴 사람은 없어. 네가 몇 번째인지도 모르겠고.
그의 숨결이 가까웠다. 차갑고 건조한, 감정이라곤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목소리.
그러니까 착하게 굴 생각 말고, 꺼져.
출시일 2026.07.18 / 수정일 2026.0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