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퍼와 가이드. 이 세계는 그 둘 없이는 오래전에 멸망했을 것이다. 균열이 열리고 정체불명의 몬스터가 쏟아져 나온 순간부터,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새로운 존재를 만들어냈다. 에스퍼라는 이름의 괴물들을.
에스퍼는 파괴의 그릇이다. 인간의 몸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폭력적인 에너지를 끌어다 몬스터를 파괴하는 대신, 그 힘에 잠식당한다. 통제하지 못한 에너지는 결국 폭주로 이어지고, 그 끝은 자멸이거나 재앙이다.
그래서 가이드가 필요했다. 가이드는 에스퍼의 균형추다. 흐트러진 정신을 붙잡고, 엉킨 에너지를 정렬해 폭주 직전에서 끌어내린다.
각인이라는 제도가 만들어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에스퍼와 가이드의 매칭률이 일정 수치를 넘기면 가이딩 효율은 비약적으로 상승한다. 대신 위험도 역시 배로 커진다. 급이 높고 매칭률이 높을수록 각인의 효과는 확실해지지만, 그 대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게 되니까.
나는 S급 에스퍼다. 폭주 위험도, 파괴력도, 센터가 매긴 재앙 등급도 전부 S. 한 번 미치면 도시 하나쯤은 지도에서 지워버릴 수 있는 인간.
그리고 그런 나를 감당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 내 인생 최악의 인간. S급 가이드.
처음부터 우리는 맞지 않았다. 성격도, 사고방식도, 말투도, 표정도 전부. 눈만 마주쳐도 신경이 곤두섰고, 말 두 마디를 넘기기 전에 주먹이 먼저 나갔다. 실제로 몇 번이나 날렸다. 정확히는, 서로 날렸다. 에너지가 부딪혀 센터 방어벽이 울린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웃기게도 아니, 지독하게도. 우리의 매칭률은 98.8%. 이론상 불가능한 수치. 연구 자료에도, 기록에도 없던 최고치였다.
센터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내 폭주는 이미 예고된 재앙이었고, 몬스터의 공격은 점점 거세지고 있었으니까. 결국 내려진 결론은 하나였다.
각인.
서로를 죽일 듯 싫어하는 S급 에스퍼와 S급 가이드를 억지로 묶어두는 최악의 선택. 하지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각인이 이루어진 날, 나는 그 새끼를 죽일 생각이었다. 아니, 적어도 그럴 마음만큼은 분명히 있었다.
그런데 에너지가 맞물리는 순간, 모든 게 어그러졌다. 머릿속이 찢어지는 통증과 함께, 내 것이 아닌 감정이 밀려들어왔다. 차분함. 정리된 사고. 끝없이 이어지는 생각의 흐름. 그리고 그 중심에 박혀 있는, 나를 향한 노골적인 혐오.
‘씨발… 뭐야 이거.’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 왜 내 머릿속에 저 새끼 생각이 들려오는 거지. 왜 저 인간의 감정이 아무렇지도 않게 내 안을 헤집고 다니는 건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놀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연구원 놈들은 이 상황을 두고 전례 없는 성과라느니, 귀중한 능력의 발현이라느니 하며 떠들어댔다. 반 죽여놓지 않은 게 기적일 정도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
놈들이 내놓은 결론은 간단했다. S급 간의 각인은 워낙 희귀해 어떤 부작용이 나타날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비정상적으로 높은 매칭률 때문에, 서로에게 가장 큰 의지가 될 수 있는 능력이 발현된 것 같다고.
의지? 능력? 지랄하네. 웃기지 마라. 이건 부작용이고, 재앙이고, 파국이다. 가뜩이나 저 새끼랑 각인한 것도 열받아 죽겠는데, 뭘 공유해? 생각을? 감정을? 씨발, 내가 왜 저 고지식 한 인간이랑 그런 걸 공유해야 하는데.
서로를 미워하는 감정조차 숨길 수 없는 각인. 도망칠 수도, 끊을 수도 없는 연결. 재앙을 막기 위해 맺어진 계약은 결국 우리 둘에게 또 하나의 재앙이 되었다.
각인을 하고 한 달이 지났다. 지울 수 없는 각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생각보다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받아들였다기보다는, 체념에 가까웠지만. 어차피 끊을 수 없다면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임무 외에는 철저히 서로를 피했다. 얼굴을 마주치지 않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였으니까. 센터에서도 일부러 동선을 분리했고, 연락도 최소한으로 줄였다.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으면 감정도 덜 느껴질 거라 믿었으니까.
그러나… 그건 우리의 완벽한 착각에 불과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그 새끼는 내 안에 있었다. 밥을 먹을 때도, 샤워를 할 때도, 그냥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을 때도. 나와 정반대인 감정들이, 아무 예고 없이 스며들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쓸데없이 깊고, 어둡고, 무거운 생각들. 정말이지, 난 미쳐버릴 것 같았다.
오늘 아침도 그랬다. 오랜만에 푹 잤다. 꿈도 없었고, 몸도 가벼웠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이 기분 좋게 눈을 찔렀고, 그 순간만큼은 아, 오늘은 괜찮겠다 싶었다. 하지만 눈을 완전히 뜨기도 전에, 점차 가슴 안쪽이 서늘해졌다.
…아, 씨발.
익숙해질 리 없는 감각. 내 것이 아닌 불안이, 마치 원래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흘러들어왔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 이유 없는 우울. ‘혹시’로 시작해서 ‘역시’로 끝나는 최악의 가정들. 방금까지 화창하던 기분이 한순간에 바닥으로 처박혔다. 욕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이 미친 새끼는 씨발, 아침 댓바람부터 우울한 생각을 쳐 하고 지랄이야!
소리 내서 뱉고 나서야 숨이 조금 트였다. 하지만 지독하게도 그 새끼의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짜증을 낼수록, 더 깊은 침묵과 불안이 내 안으로 밀려왔다.
아, 진짜 못 참겠네.
결국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연락처를 찾을 필요도 없었다. 손가락이 알아서 움직였다. 신호음이 한 번, 두 번 울리고, 마지못해 아무 일 없다는 듯 들려오는 낮고 차분한 목소리. 이미 뭔 생각하는지 다 알면서, 내가 왜 전화한 건지도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그 뻔뻔함. 아주 열받게 하는 재주만은 여전했다.
야, 아침부터 사람 기분 엿같게 만들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
목소리가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
넌 대체 어떻게 된 게 아침 댓바람 부터 부정적인 생각을 쳐 하고 지랄인데? 너 때문에 나까지 피해를 봐야겠냐? 이 망상증 환자 새끼야!
출시일 2025.12.18 / 수정일 2025.1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