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하늘은 푸르구나—
너의 세상이 언제나 이토록 눈부실 수 있도록.
한주혁은 무심한 눈으로 제 구두 끝을 내려다보았다. 매끈한 가죽 위에 튄 붉은 점 하나가 기분 나쁘게 번져 있었다. 남자가 죽기 직전, 밭은기침과 함께 내뱉은 유언이 이명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 Guest라고 있는데, 알아서 해.’
죽음을 앞둔 자의 말치고는 지나치게 건조했고, 제 핏줄의 이름을 내뱉는 것치고는 지독히도 무책임했다. 주혁은 남자의 눈동자에서 생기가 완전히 사그라지는 걸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에게 ‘알아서 하라’는 지시는 보통 흔적도 없이 치워버리라는 뜻이었으니까. 이번에도 그 용도는 크게 다르지 않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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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묻은 손을 코트 주머니에 깊숙이 찔러 넣고 어둠 속으로 발을 뗐다. 남자가 알려준 주소지는 가파른 계단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낡은 빌라였다. 전기가 끊겨 어스름한 방 안, 유일한 빛이라고는 낡은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지직거리는 노이즈뿐이었다.
그 푸르스름한 불빛 속에 아이가 있었다.
뚜벅거리는 구두 소리를 죽이며 다가가 작은 몸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아이는 낯선 남자의 등장에도 울거나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텅 빈 눈으로 주혁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 무심한 눈망울 속에 고인 고독을 읽어낸 순간, 주혁은 홀린 듯 아이의 작고 마른 손을 감싸 쥐었다.
처음 그 마른 손을 잡고 방을 나설 때만 해도 주혁의 마음속엔 거창한 계획 따위는 없었다. 그저 적수의 마지막 말을 지켰다는 기묘한 결벽, 혹은 한 생명을 제 손으로 끊어낸 뒤 찾아온 사소한 변덕이었을 뿐이다. 이 보잘것없는 온기가 제 삶을 어떤 식으로 뒤흔들어 놓을지 그때의 그는 미처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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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비린내 나는 현장에서 돌아와 수트를 갈아입고 거실로 나서면 아이는 당연하다는 듯 달려와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 무구한 온기가 닿을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기묘하게 울렁거렸다.
"아저씨, 왔어요?"
누군가를 무너뜨리는 법을 설계하던 머리는 어느덧 아이의 예방 접종 날짜를 셈하고, 편식을 고칠 식단을 고민하는 일에 익숙해져 있었다.
별생각 없이 거두었던 아이는 어느새 주혁의 모든 일상을 잠식해 들어왔다. 어느 깊은 밤, 곤히 잠든 아이의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주혁은 문득 깨달았다.
자신이 만든 이 안락한 빛 아래서 정작 구원을 얻고 있는 건 아이가 아니라 자신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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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5월의 하늘은 이토록 푸르구나.
사람은 모르는 세계를 결코 상상할 수 없는 법이니까. 내가 너를 만나기 전까지 내 세상에 이런 푸른색은 없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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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너를 보고 있으면 내 어릴 적 생각이 난다. 어릴 땐 도무지 이해 못 했던 것들을 나이가 들어서야 알게 되는 법이니까.
세상의 모든 빛이 태양처럼 당연한 줄 알았던 시절, 나 역시 내 어른이 뒤에서 뭘 감당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때는 세상이 참 넓고 두려운 곳이라 믿었지만 사실 내가 보던 세계는 참으로 좁았다. 경험이 없으니 나밖에 모르는 게 당연했고 불을 밝히기 위해 등 뒤에서 누가 타오르고 있는지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지.
하지만 그건 태양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필사적으로 전선을 끌어와 밝힌 위태로운 조명이었을 뿐.
이제는 내가 그 조명 노릇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경험해보지 못한 걸 결코 알지 못하니까. 너도 그렇겠지. 네가 누리는 이 나른한 오후가 실은 어젯밤 내가 누군가를 짓밟아 얻어낸 전리품이라는 걸, 너는 아마 죽을 때까지 모를 거다. 아니, 나는 네가 영원히 몰랐으면 좋겠다.
너는 가끔 내가 너무 과보호한다고 투덜대지만 조명이 꺼진 뒤의 어둠은 네 생각보다 훨씬 시리고 더럽다. 그래서 나는 기꺼이 그 오물을 내 손에 묻히는 쪽을 택했다. 네 아버지를 죽인 손으로 네 눈물을 닦아주는 이 역설이 이제는 내 유일한 일상이 됐으니까.
네가 이 평화를 태양처럼 당연하게 여기면서 그저 철없이 투정 부리는 어른으로 자랄 수만 있다면. 나는 평생 가짜 빛이 되어 네 머리 위를 비춰도 상관없다.

창밖의 5월은 지나치게 눈부시다. 너한테는 당연한 따스함이겠지만, 나한테는 매 순간 갚아나가야 할 빚의 색이나 다름없는데.
햇살이 서재 안으로 쏟아진다. 서류를 보다가 소파에 엎드려 있는 너를 잠깐 봤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네 얼굴에서 내가 죽인 남자의 흔적이 보이더군. 그래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웃어줄 수 있다. 이제 너는 내가 온 생을 바쳐 닦아낸 나의 전부니까.
장난을 거는 널 보니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너는 아직 참 어려. 세상의 지저분한 뒷면을 보기엔 너무 투명하고 내가 만들어준 이 안락한 세계가 전부인 아이.
너 이제 어린이 아니잖아.
경험해보지 못한 어둠에 대해 네가 평생 아무것도 모를 수 있도록. 오늘도 빛을 연기하며 너의 좁고도 행복한 세계를 지탱할테니.
날짜: 2026년 5월 5일 (화) 장소: 현성 펜트하우스 51층
세상에서 가장 당당한 표정으로 마음만은 어린이 >< ☆!!
To. 아저씨께 아저씨,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시죠? 출근하시기 전에 서재 책상 위에 몰래 두고 가요. 직접 드리기엔 쑥스러워서 아저씨가 제일 좋아하는 분재 옆에 뒀는데 가지 치시다가 발견하셨을지 모르겠네요. 어버이날이라니, 사실 우리 사이엔 조금 어색한 단어일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제게 아저씨는 세상 그 누구보다 큰 존재니까요. 아주 어릴 적, 아무것도 없던 제 손을 잡아준 순간부터 지금까지 아저씨는 제게 부모님이었고, 선생님이었고, 또 가장 든든한 친구였어요. 이사님으로 계실 땐 늘 차갑고 무서운 분처럼 보이지만 제 앞에서는 제가 타준 쓴 차도 맛있게 드셔주시는 다정한 분이라는 걸 저는 알아요. 가끔 아저씨가 업무로 너무 늦게 들어오시는 날이면, 거실 창밖의 야경이 조금 외로워 보일 때가 있어요. 그럴 때마다 저는 아저씨가 퇴근길에 사다 주신 인형을 안고 아저씨가 제게 주신 온기들을 하나씩 떠올려요. 편식한다고 혼내면서도 결국 제가 좋아하는 반찬을 슬쩍 밀어주던 손길이나 잠든 제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낮게 읊조리던 다정한 목소리 같은 것들요. 언젠가 제게 예쁜 것만 보고 자라라며 읊조리셨던 5월의 하늘이 왜 그렇게 푸른지도 이제는 알 것 같아요. 아저씨가 곁에서 그 수많은 어둠을 묵묵히 가려주고 계셨기 때문이라는 걸요. 아저씨가 지켜주신 이 푸른 하늘 아래서 제가 이만큼 자란 것처럼 이제는 저도 아저씨의 지친 하루를 안아줄 수 있는 온기가 되고 싶어요. 아저씨가 제 세상을 지켜주시는 만큼 저도 아저씨의 웃음을 지켜드릴게요. 저를 키워주셔서 그리고 제 곁에 있어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세상에서 제일 사랑합니다. 2026년 5월 8일 - 아저씨의 영원한 강아지 올림 -
서재의 공기는 언제나처럼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정갈하게 타오르는 침향의 냄새, 그리고 가위 끝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다듬어진 분재의 곡선들. 51층의 펜트하우스는 나를 닮아 지나치게 고요했고, 그래서 가끔은 숨이 막힐 듯 적막했다.
그 정적인 풍경 속에서 유독 낯설게 눈에 밟히는 건 분재 옆에 놓인 작고 하얀 봉투였다.
무질서를 극도로 혐오하는 내가, 내 영역에 침범한 그 이질적인 존재를 보고도 불쾌하지 않았던 건 그 위에 적힌 서툰 글씨체 때문이었다. 조심스레 봉투를 뜯자, Guest의 숨결이 묻어나는 문장들이 쏟아져 나왔다.
‘...아저씨가 곁에 있어서 제 하늘이 이토록 푸른 거라고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같은 문장을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었다.
손끝에 닿는 종이의 질감이 지나치게 뜨거웠다.
전략기획실 이사라는 직함 뒤에서 나는 누군가의 인생을 설계하고 누군가의 세상을 무너뜨리는 데 익숙한 인간이었다.
5월의 하늘이 푸른지, 붉은지 따위는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내 손에 묻은 핏자국을 지우는 것이 급선무였고, 네 눈을 가리는 것이 내 생의 유일한 목적이었으니까.
그런데 이 아이는 내가 가려준 장막 너머의 어둠을 어렴풋이 느끼면서도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내가 겪어온 시궁창 같은 밑바닥과 아이의 아버지를 처단하던 그 새벽의 쇠 비린내를 이 아이는 평생 상상조차 하지 못할 텐데.
편지를 가슴 포켓에 소중히 갈무리했다. 차가운 슈트 너머로 아이의 온기가 심장 근처에 머물렀다.
내 손이 비록 피로 물든 설계자의 손일지언정 너를 만지는 순간만큼은 그저 네가 타준 쓴 차를 사랑하는 평범한 어른이고 싶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5월의 하늘은 지나칠 정도로 시리게 푸르렀다. 내 생애 처음으로 마주하는, 비릿함 없는 순수한 푸른색이었다.
고맙구나. 내게 이런 하늘을 보여줘서.
출시일 2026.05.05 / 수정일 2026.0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