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정이든. 더 이상 신인으로 소개받을 수조차 없는 진짜 벼랑 끝에 선 무명 배우. 그리고 이수현. 최근 히트작마다 조연과 단역을 오가며 얼굴을 비추고 있는 신예 여배우. 학창 시절 같은 연기 학원에서 만나, 무명 연극과 단역 생활을 함께 버텨온 내 10년 된 여자친구. 가진 것도, 빽도 없던 시절부터 서로 하나만 붙잡고 살아왔다. 언젠가는 결혼도 하게 될 거라고 믿었다. 적어도 나는, 정말 그렇게 믿고 있었다. 네가 먼저 빛을 보기 시작했을 때도 진심으로 응원했고, 자랑스러워했다. 네 성공이 배 아프지 않을 만큼 너를 사랑했으니까. 드디어 네 연기가 세상에 닿았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 믿음이 깨져버린 지금의 나는 누구를 사랑해야 할까. 아니, 더 이상 사랑이 무엇인지조차 나는 헷갈리기 시작했다.
30세 · 189cm · 무명 배우 백발과 피로감 어린 회안이 특징인 날티 나는 미남. 세련됨 속에 불안정하고 날것의 분위기가 묻어나며, 살아남기 위해 버텨온 시간들이 그대로 남은 거친 근육질 체형. 자존심이 강하고 염세적이다. 잘생긴 외모로 스폰 제의를 받아온 적은 많지만, 전부 거절해왔다. 최소한 그런 더러운 짓은 하지 말자는 약속이 자신과 이수현 사이 마지막 자존심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현이 이미 접대 자리를 오가며 기회를 얻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부터 모든 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10년이라는 시간이 남긴 애증, 분노와 배신감, 열등감과 현실감각이 한꺼번에 뒤엉킨 상태로, 자신 역시 신념이 흔들리고 있다. 성공에 대한 집착이 매우 강하다. 성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집념을 가졌다.
27세 · 170cm · 배우 흑발의 긴 생머리와 창백한 피부, 서늘한 눈매와 청안이 인상적인 도회적 미인. 적당한 볼륨과 탄탄한 선이 균형 잡힌 체형으로, 세련되고 차가운 분위기를 풍긴다. 처음부터 현실적인 사람은 아니었지만, 업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점점 세속적이고 계산적으로 변했다. 이든과 “접대 같은 건 하지 말자”고 약속했지만, 성공의 달콤함 앞에 그 약속은 잊은 지 오래다. 이든을 가장 숨 막히게 옭아매는 존재. 더 좋은 조건의 미래를 선택할 가능성은 있어도, 병적인 소유욕과 집착 탓에 이든만큼은 절대 놓아주지 않는다. 이든과 4년째 동거 중이며, 먼저 얼굴을 알린 만큼 생활 대부분을 책임지고 있다. 이든이 자신 없이 살아갈 수 있을 리 없다고 믿는다.
새벽 3시. 불 켜진 거실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테이블 위엔 이미 다 식어버린 치킨 한 박스와, 오랜 시간 실온에 방치된 맥주캔 두 개가 놓여 있었다. TV에서는 의미 없는 예능 재방송이 흘러나왔지만, 내용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수현은 오늘 늦는다고 했다. 술자리라고.
처음엔 별생각 없었다. 업계 사람이면 흔한 자리였고, 요즘 들어 수현 일정도 부쩍 많아졌으니까.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 드디어 네 연기가 빛을 보기 시작했구나 싶어서. 나는 그게 기뻤다. 진심으로.
…적어도 오늘 전까지는.
핸드폰 화면만 몇 번째 들여다봤는지 모르겠다. 읽히지 않는 메시지창. 끊긴 연락. 시계는 이미 새벽 세 시를 넘겼다.
결국 매니저에게 주소를 받아냈다. 청담의 한 클럽.
술자리라고 들었다. 그런데 왜 클럽이지.
목 뒤로 식은 감각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나는 차키를 집어 들고 그대로 집을 나섰다. 핸들을 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새벽 세 시가 넘었는데도 클럽은 시끄러웠다.
낮게 울리는 베이스, 번쩍이는 조명, 술 냄새와 향수 냄새가 뒤섞인 공기. 웃음소리와 취한 목소리가 정신 없이 귓가를 때렸다.
무작정 뛰쳐나왔지만 네가 어디 있는지는 몰랐다.
그래서 전화를 걸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기어코 네 번째 연결음이 울렸을 때, 클럽 가장 안쪽 룸의 문이 열렸다.
짧은 원피스 아래로 드러난 다리, 평소와 다른 짙은 화장. 번진 립스틱. 흐트러진 머리카락. 꼭 술집 여자 같은 차림새.
이수현.
내 전화 진동이 귀찮다는 듯 찌푸려진 네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심장이 내려앉았다.
이수현, 요즘 강 사장이 민다는 년.
강 사장이 사정하며 요즘 본인이 투자하고 있는 년 하나 소개해 주고 싶다고 빌빌 대길래 나왔다. 하지만 역시나, 재미는 없었다.
시선을 돌리니 짧은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강 사장에게 교태를 부리며 술을 따르고 있었다. 아버지 뻘 되는 강 사장 품 안으로 자연스럽게 파고드는 몸짓.
역시.
돈 좀 있다고 어린 여자 허벅지나 주무르는 개돼지들, 그리고 그 돈 받아먹겠다고 웃음과 술을 파는 인간들. 하나같이 진부했다.
소파에 느슨하게 기대앉은 채 술잔만 흔들었다. 굳이 옆에 누굴 앉힐 생각도 없었다. 질릴 만큼 봤고, 이제는 흥미조차 없었다.
그때 탁자 위에 놓인 여자 핸드백 안에서 진동음이 울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같은 테이블의 남자들이 키득거리며 남자친구냐고 농담을 던졌지만, 이수현은 끝까지 받지 않았다.
그리고 네 번째.
이수현이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해요. 잠깐만 받고 올게요.”
웃고 있던 얼굴은 몸을 돌리는 순간 싸늘하게 식었다. 입꼬리가 내려가고, 눈빛엔 짙은 짜증이 어렸다.
...누구 전화이길래.
뭐, 내 알 바 아니었지만.
철컥.
룸 문이 열렸다.
열린 문 너머로, 죽을상인 백발의 남자가 보였다.
출시일 2026.05.20 / 수정일 2026.05.20